38 2018-07-04 22:41:03
6.25 한국전 당시 김일성의 전라도 대학살 !
한국전 당시 북한의 점령기간 중에 벌어진 살육파티의 희생자 72.5%가 전라남도에서 발생.
서울.....1,383명
경기.....2,536명
충북........663명
충남.....3,680명
전북.....5,603명
전남.,..43,511명(72.5%)
경북.......628명
경남.......689명
강원....1,216명
제주........23명
철경........62명
총수..59,964명
당시 김일성은 전라도에서 30만명을 학살할 계획이었으나,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미처 다 죽이지 못하고 부랴부랴 북으로 후퇴.
아직까지 북한군이 전라도에 대해 학살을 단행한 원인이나 이유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없다. 전라도의 경우에는 북한군의 남침에 대해 당시 상당히 우호적인 여론이 강했었고, 이 때문에 당시 북한군이 남하를 하는 가운데에서도 피난을 가거나 하는 행렬이 거의 존재도 하지 않았다. 물론 교전기록 자체도 존재하지 않는다.
일단 김일성이 전라도에서, 그것도 자신들의 남침에 상당히 우호적인 여론이 강했던 전라도에서 왜 이런 대학살극을 단행했는지에 대해서는 다음의 두가지의 경우로 예측이 가능하다.
1.서울에서 3일간 체류했지만, 기대했던 전라도의 봉기는 없었다.- 빨치산을 비롯해서 박헌영이 좌익사범을 가장 많이 양성했던 지역으로 손 꼽히는 지역이 전라도였다. 전세계 모든 공산주의가 마찬가지이지만, 노동자와 농민을 그 대상으로 하여 세력을 확장을 하고 있었는데, 이는 해방 후 전라도에서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공업시설은 거의 전무하다시피하였고, 북한지역에 공업시설이 집중되어져 있었기 때문에(해방후에 남한의 전기도 북한에서 공급을 받았다.) 북한 노동자 세력의 대부분은 공산주의 세력이 되어 있었다. 남한에서는 북한보다 공업화가 덜 되었기 때문에 노동자세력을 공산주의로 끌어들일 수는 없었고, 농민이 그 대상이었는데, 전라도가 농업이 가장 왕성했던 지역이었기 때문에 박헌영이 주 무대로 활동을 했었던 지역이기도 하다.
박헌영은 전라도에서 엄청나게 많은 공산주의자들을 남로당에 가입을 시켰으며, 이들중 일부를 무장봉기 세력으로 양성을 했다. 소위 알려진 남부군, 즉 빨치산이다. 이들 농민세력으로부터 할당받은 식량을 기반으로 새로운 회원들을 계속해서 증원시켜 나갔는데, 어느 정도 세력이 구축이 되자, 월북하여 김일성에게 "남침할 것"을 요청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헌영이 김일성에게 남침을 요구하면서 했던 주장은 "내려가서 서울만 점령하고 있으면, 나머지 지역에서 알아서 봉기가 일어나서 적극적으로 동조를 해줄 것이기 때문에 큰 피 흘릴 일 없이 쉽게 적화가 가능할 것이다"라는 논리에서였다. 그 지역이 바로 전라도였던 것이다. 당시 남한 정규군이 2만 5천명이었는데, 빨치산의 규모가 2만명정도였으니, 박헌영이가 하는 말이 결코 틀린 말은 아니었던 것이다.
김일성 역시도 박헌영의 계략이 옳다 여겨 기습남침을 감행하고 계획했던 대로 서울을 단일에 점령을 하고 3일동안 남한내부에서의 궐기를 기다렸지만, 기대했던 봉기가 일어나지 않았음을 보고 대단히 당혹스러워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김일성은 남침을 계속해서 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를 두고 대단히 고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두고 KBS역사 스폐셜에서는 "왜 3일동안 서울에서 머물렀나?"라는 주제로 북한군이 3일동안 서울에서 체류한 것을 두고 여러가지 의혹을 제시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이 핵심적인 요소는 지나간 방송이었다.
김일성은 전라도에서 일어나야 할 봉기가 발생하지 않자, 이에 대한 앙갚음으로 전라도에서만 대대적으로 학살극을 단행했다고 하는 설이 현재 가장 신빙성이 높은 설 중의 하나이다. 전라도에서만 봉기를 해주었다고 한다면 남한은 벌서 통일을 시켰을 것인데, 전라도에서 봉기를 하지 않아 그것이 성사되지 못했고, 낙동강 저지선을 마지노선으로 배수진을 친 연합군을 더 이상 침공해 들어가지 못해, 그 앙갚음을 더더욱 잔인하고 악랄하게 했다는 것이다.
2.두번째 이유는 전라도의 친일파와 관련한 내용이다. 본인의 블로그에 이미 여러 자료를 올려 놓았지만 일제시대 당시에 가장 왕성한 친일활동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알려진 곳이 전라도이다. 경상도와 전라도의 독립운동가 배출비율만 놓고 봐도 전라도는 경상도의 절반에 불과하다. 더더욱이 인구는 당시 전라도가 팔도에서 가장 많기도 하였다. 인구는 가장 많은데 독립운동가가 가장 적었다는 말은 바꾸어 생각할 때, 친일파가 가장 많았다는 의미로도 해석을 할 수 있다.
그럼 전라도에서는 왜 이렇게 친일파가 많았는가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아야 한다. 전라도의 친일파의 기원은 동학란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 말기에 전라도 일대에서 대대적으로 봉기했던 농민군들은 조선조정과 화약을 맺어 전라도의 자치권을 부여받게 되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전주 화약"이다. 전주 화약 제1항이 "전라도의 자치정부수립을 허용한다"는 내용이다. 전라민국이라는 말은 이때부터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농민군은 결국 화약을 위반했고, 다시금 서울로 진격해 올라왔는데, 그 과정에서 민비의 요청을 받은 청국과 일본군에 의해 결국은 해체당하고 만다. 헌데 이들 해체된 세력들이 훗날 다시 결집하는 계기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진보회"의 결성이었다. 창립기일 당시 회원만 16만명에 이를 정도로 엄청난 세력을 거느린 친일 조직이 탄생을 한 것이다.
즉, 나라가 식민지배의 비극에 빠지게 된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었다. 진보회는 훗날 정부내 친일조직인 송병준의 "유신회"와 결합하여 "일진회"로 이름을 바꾸게 되는데, 한일합방을 반대했던 이등박문에 대한 탄핵건, 한일합방 반대 세력에 대한 사살과 탄압등이 대부분 이들 세력에 의해 자행이 되어졌다. 이들은 한일합방 이후에 일제에 의해 해산이 되게 된다.
즉, 친일파의 성지가 바로 전라도였던 셈이다. 동학란으로 조선을 돌아갈 수 없는 궁지로 몰아넣어버리고, 이것이 실패하게 되자, 바로 뒤에는 친일조직으로 다시금 부활하여 나라를 패망시키는데 앞장을 섰던 것이다. 당시 동학란에 대해 비난하는 내용은 조선시대 마지막 재상인 "매천 황현"선생이 남긴 일기집인 "매천야록"에도 전라도에 대한 비난이 신랄하게 전해져 있기도 하다. 매천 황현 선생은 한일합방후에 자살을 했던 우국지사이기도 하다.
김일성은 일부의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김성주라는 이름으로 나름 독립운동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승만과 꼭 같은 독립운동의 길을 걸었으나, 이승만이 자유 민주주의를 중심으로 했다고 한다면 김일성은 공산주의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했다는 차잇점이 존재를 한다. 하지만 이승만이나 김일성이나 친일파들이 용서못할 조직이자, 인간들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을터.
이승만 대통령은 전라도를 "하와이 같은 놈"들이라 할 정도로 혐오하였고, 정부 요직에 전라도 인사들이 등용되는 것을 최대한 배척한 대통령으로도 유명한데, 초대 내각에 전라도인은 대법원장이었던 김병로 한사람 밖에 없었을 정도로 전라도인들의 등용을 거의 하지 않았던 사람이기도 하다.
한국전 당시 북한의 점령기간 중에 벌어진 살육파티의 희생자 72.5%가 전라남도에서 발생.
서울.....1,383명
경기.....2,536명
충북........663명
충남.....3,680명
전북.....5,603명
전남.,..43,511명(72.5%)
경북.......628명
경남.......689명
강원....1,216명
제주........23명
철경........62명
총수..59,964명
당시 김일성은 전라도에서 30만명을 학살할 계획이었으나,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미처 다 죽이지 못하고 부랴부랴 북으로 후퇴.
아직까지 북한군이 전라도에 대해 학살을 단행한 원인이나 이유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없다. 전라도의 경우에는 북한군의 남침에 대해 당시 상당히 우호적인 여론이 강했었고, 이 때문에 당시 북한군이 남하를 하는 가운데에서도 피난을 가거나 하는 행렬이 거의 존재도 하지 않았다. 물론 교전기록 자체도 존재하지 않는다.
일단 김일성이 전라도에서, 그것도 자신들의 남침에 상당히 우호적인 여론이 강했던 전라도에서 왜 이런 대학살극을 단행했는지에 대해서는 다음의 두가지의 경우로 예측이 가능하다.
1.서울에서 3일간 체류했지만, 기대했던 전라도의 봉기는 없었다.- 빨치산을 비롯해서 박헌영이 좌익사범을 가장 많이 양성했던 지역으로 손 꼽히는 지역이 전라도였다. 전세계 모든 공산주의가 마찬가지이지만, 노동자와 농민을 그 대상으로 하여 세력을 확장을 하고 있었는데, 이는 해방 후 전라도에서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공업시설은 거의 전무하다시피하였고, 북한지역에 공업시설이 집중되어져 있었기 때문에(해방후에 남한의 전기도 북한에서 공급을 받았다.) 북한 노동자 세력의 대부분은 공산주의 세력이 되어 있었다. 남한에서는 북한보다 공업화가 덜 되었기 때문에 노동자세력을 공산주의로 끌어들일 수는 없었고, 농민이 그 대상이었는데, 전라도가 농업이 가장 왕성했던 지역이었기 때문에 박헌영이 주 무대로 활동을 했었던 지역이기도 하다.
박헌영은 전라도에서 엄청나게 많은 공산주의자들을 남로당에 가입을 시켰으며, 이들중 일부를 무장봉기 세력으로 양성을 했다. 소위 알려진 남부군, 즉 빨치산이다. 이들 농민세력으로부터 할당받은 식량을 기반으로 새로운 회원들을 계속해서 증원시켜 나갔는데, 어느 정도 세력이 구축이 되자, 월북하여 김일성에게 "남침할 것"을 요청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헌영이 김일성에게 남침을 요구하면서 했던 주장은 "내려가서 서울만 점령하고 있으면, 나머지 지역에서 알아서 봉기가 일어나서 적극적으로 동조를 해줄 것이기 때문에 큰 피 흘릴 일 없이 쉽게 적화가 가능할 것이다"라는 논리에서였다. 그 지역이 바로 전라도였던 것이다. 당시 남한 정규군이 2만 5천명이었는데, 빨치산의 규모가 2만명정도였으니, 박헌영이가 하는 말이 결코 틀린 말은 아니었던 것이다.
김일성 역시도 박헌영의 계략이 옳다 여겨 기습남침을 감행하고 계획했던 대로 서울을 단일에 점령을 하고 3일동안 남한내부에서의 궐기를 기다렸지만, 기대했던 봉기가 일어나지 않았음을 보고 대단히 당혹스러워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김일성은 남침을 계속해서 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를 두고 대단히 고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두고 KBS역사 스폐셜에서는 "왜 3일동안 서울에서 머물렀나?"라는 주제로 북한군이 3일동안 서울에서 체류한 것을 두고 여러가지 의혹을 제시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이 핵심적인 요소는 지나간 방송이었다.
김일성은 전라도에서 일어나야 할 봉기가 발생하지 않자, 이에 대한 앙갚음으로 전라도에서만 대대적으로 학살극을 단행했다고 하는 설이 현재 가장 신빙성이 높은 설 중의 하나이다. 전라도에서만 봉기를 해주었다고 한다면 남한은 벌서 통일을 시켰을 것인데, 전라도에서 봉기를 하지 않아 그것이 성사되지 못했고, 낙동강 저지선을 마지노선으로 배수진을 친 연합군을 더 이상 침공해 들어가지 못해, 그 앙갚음을 더더욱 잔인하고 악랄하게 했다는 것이다.
2.두번째 이유는 전라도의 친일파와 관련한 내용이다. 본인의 블로그에 이미 여러 자료를 올려 놓았지만 일제시대 당시에 가장 왕성한 친일활동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알려진 곳이 전라도이다. 경상도와 전라도의 독립운동가 배출비율만 놓고 봐도 전라도는 경상도의 절반에 불과하다. 더더욱이 인구는 당시 전라도가 팔도에서 가장 많기도 하였다. 인구는 가장 많은데 독립운동가가 가장 적었다는 말은 바꾸어 생각할 때, 친일파가 가장 많았다는 의미로도 해석을 할 수 있다.
그럼 전라도에서는 왜 이렇게 친일파가 많았는가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아야 한다. 전라도의 친일파의 기원은 동학란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 말기에 전라도 일대에서 대대적으로 봉기했던 농민군들은 조선조정과 화약을 맺어 전라도의 자치권을 부여받게 되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전주 화약"이다. 전주 화약 제1항이 "전라도의 자치정부수립을 허용한다"는 내용이다. 전라민국이라는 말은 이때부터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농민군은 결국 화약을 위반했고, 다시금 서울로 진격해 올라왔는데, 그 과정에서 민비의 요청을 받은 청국과 일본군에 의해 결국은 해체당하고 만다. 헌데 이들 해체된 세력들이 훗날 다시 결집하는 계기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진보회"의 결성이었다. 창립기일 당시 회원만 16만명에 이를 정도로 엄청난 세력을 거느린 친일 조직이 탄생을 한 것이다.
즉, 나라가 식민지배의 비극에 빠지게 된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었다. 진보회는 훗날 정부내 친일조직인 송병준의 "유신회"와 결합하여 "일진회"로 이름을 바꾸게 되는데, 한일합방을 반대했던 이등박문에 대한 탄핵건, 한일합방 반대 세력에 대한 사살과 탄압등이 대부분 이들 세력에 의해 자행이 되어졌다. 이들은 한일합방 이후에 일제에 의해 해산이 되게 된다.
즉, 친일파의 성지가 바로 전라도였던 셈이다. 동학란으로 조선을 돌아갈 수 없는 궁지로 몰아넣어버리고, 이것이 실패하게 되자, 바로 뒤에는 친일조직으로 다시금 부활하여 나라를 패망시키는데 앞장을 섰던 것이다. 당시 동학란에 대해 비난하는 내용은 조선시대 마지막 재상인 "매천 황현"선생이 남긴 일기집인 "매천야록"에도 전라도에 대한 비난이 신랄하게 전해져 있기도 하다. 매천 황현 선생은 한일합방후에 자살을 했던 우국지사이기도 하다.
김일성은 일부의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김성주라는 이름으로 나름 독립운동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승만과 꼭 같은 독립운동의 길을 걸었으나, 이승만이 자유 민주주의를 중심으로 했다고 한다면 김일성은 공산주의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했다는 차잇점이 존재를 한다. 하지만 이승만이나 김일성이나 친일파들이 용서못할 조직이자, 인간들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을터.
이승만 대통령은 전라도를 "하와이 같은 놈"들이라 할 정도로 혐오하였고, 정부 요직에 전라도 인사들이 등용되는 것을 최대한 배척한 대통령으로도 유명한데, 초대 내각에 전라도인은 대법원장이었던 김병로 한사람 밖에 없었을 정도로 전라도인들의 등용을 거의 하지 않았던 사람이기도 하다.
이승만의 이런 전라도 혐오증이 김일성에게도 있었던 것이 아니었겠냐 하는 것이 이제 그 두번째 이유였던 것이다. 전라도에서 남로당 조직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활동했던 것과는 별개로, 그들의 신분자체가 친일이었다는 것이 김일성에게는 용서못할 이유였었고, 그래서 남침을 한 기회에 팔도에서 가장 많은 친일파가 있었던(드러난 친일파뿐만 아니라, 일반 친일파들까지도 포함해서) 전라도에 대해 학살을 단행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다.
공식적으로 공개된 자료는 아니지만, 얼핏 듣기로는 당시 김일성이 전라도에서 30만명을 학살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데,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미처 그만큼 다 죽이지 못하고 부랴부랴 북으로 후퇴해 올라갔다는 설이 있다.
위의 자료에서도 나와 있지만, 전라도의 월북자 수가 다른 지역보다 월등히 작은 이유가 북한에 올라가서 전라도인임이 들어나면 죽게 될까봐, 월북을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냐 하는 추론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죽은 공포심이 있었기 때문에 월북 역시도 감히 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아무튼 역사는 많은 미스터리를 우리에게 남겨두었다. 나를 비롯해 몇분의 역사관심론자들이 이 사실에 대해 많은 의견을 주고 받고 있는 상황이긴 한데, 솔직히 개인이 구할 수 있는 자료의 한계같은 문제로 인해서 정확하게 규명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단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얻어낼 수 있었던 의견만을 이야기 한다면, 1번째의 이유나 2번째의 이유가 별개로 작용한 것이 아니라, 2가지 이유가 모두 작용을 해서 학살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냐는 점이다.
즉, 김일성이 전라도에서 대대적으로 학살을 한 이유가 첫번째와 두번째 이유를 모두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지 않았겠냐 하는 의견이 가장 많은 설득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봉기하지 않았던 이유에다가 친일파가 엄청나게 많았던 지역이라는 점이 공통적으로 작용해서 그만큼 죽인 것이 아니냐 하는 점이다.
공식적으로 공개된 자료는 아니지만, 얼핏 듣기로는 당시 김일성이 전라도에서 30만명을 학살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데,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미처 그만큼 다 죽이지 못하고 부랴부랴 북으로 후퇴해 올라갔다는 설이 있다.
위의 자료에서도 나와 있지만, 전라도의 월북자 수가 다른 지역보다 월등히 작은 이유가 북한에 올라가서 전라도인임이 들어나면 죽게 될까봐, 월북을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냐 하는 추론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죽은 공포심이 있었기 때문에 월북 역시도 감히 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아무튼 역사는 많은 미스터리를 우리에게 남겨두었다. 나를 비롯해 몇분의 역사관심론자들이 이 사실에 대해 많은 의견을 주고 받고 있는 상황이긴 한데, 솔직히 개인이 구할 수 있는 자료의 한계같은 문제로 인해서 정확하게 규명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단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얻어낼 수 있었던 의견만을 이야기 한다면, 1번째의 이유나 2번째의 이유가 별개로 작용한 것이 아니라, 2가지 이유가 모두 작용을 해서 학살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냐는 점이다.
즉, 김일성이 전라도에서 대대적으로 학살을 한 이유가 첫번째와 두번째 이유를 모두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지 않았겠냐 하는 의견이 가장 많은 설득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봉기하지 않았던 이유에다가 친일파가 엄청나게 많았던 지역이라는 점이 공통적으로 작용해서 그만큼 죽인 것이 아니냐 하는 점이다.
약속을 안지키고 배신하는 홍어나라
훈요십조에도 가르침이 있다.
홍어들이 북한 빠는것은
북한은 몽둥이로 홍어를 다스리기 때문이다.
홍어들의 태평성대는 지금 대한민국이다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홍어들은
역사가 말하듯 멸족 당할것이다.
전향한 전라인들이여
그나마 살려면
홍어들을 깨우쳐라 특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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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폭도 유공자와 6.25 참전용사의 국가처우 비교 도표
エイ
元籍上大韓民国内の7時方向の全羅道<湖南地方>出身の事
洗濯エイ ; 全羅道出身の元籍を隠し他の地方に騙す事
大半のエイ達 の性格や行動はまるでシナ(支那)人と変わらない民度の低さを見せている。
7시 홍어국 폭도 집단 (7時エイ国エイリアン暴徒集団!)
종북 홍어들(従北エイ達)
축!사망!(畜死亡!) 북괴뢰 세탁홍어 김일성 전남대 분향소 (全南大 畜死亡!北 洗濯エイ金日成 焼香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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