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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르바' 박대성 "정부 전복 위해 자살하라는 사람 있었다"

2020-07-22 13:26:09 | 사회,정치(社会、政治)

'미네르바' 박대성 "정부 전복 위해 자살하라는 사람 있었다"

 
입력 2011.03.07 18:38 | 수정 2011.03.07 18:42
 

 

미네르바 박대성
'미네르바' 박대성 / 조선일보 DB
“수감돼 있던 어느 날 20대가 면회를 신청했다. 그는 다짜고자 ‘당신이 여기서 자살하면 이명박 정권 붕괴의 시발점이 될 수 있다’며 자살을 종용했다.”

본명 박대성보다 ‘미네르바’라는 필명이 더 유명한 그는 한때 105㎏에 이르던 몸무게가 현재 63㎏로 쭉 빠졌다. 박씨는 “지난 2009년 검찰 수사로 감옥에 수감된 당시, 몇몇 젊은이들이 면회를 와 ‘이명박 정부 전복, 열사가 돼 달라’며 자살을 종용하기도 했다”고 말했다고 인터넷 매체 데일리안은 7일 전했다. 

2008년 7월 미국 투자은행 리먼브라더스의 파산을 ‘예언’한 뒤 ‘인터넷 경제 대통령’으로 추앙됐던 그는 같은해 12월 “정부가 주요 7대 금융기관과 수출입 관련 주요 기업에 달러 매수를 금지할 것을 긴급 공문으로 전송했다”는 글이 문제가 돼 검찰에 전격 체포됐다. 하지만 작년 12월 헌법재판소가 박씨에 대한 검찰 기소 이유였던 전기통신기본법 제47조 1항에 대해 위헌판결을 내자 박씨는 자유인으로 돌아왔다.

그는 데일리안과의 인터뷰에서 ‘이명박 정부 전복’을 거론하며 박씨에게 자살을 우회적으로 종용한 사람들이 몇 번에 걸쳐 교도소로 왔었다고 했다. 

박씨는 “어느 날 한 20대가 면회를 신청해 ‘당신이 여기서 자살하면 이명박 정권 붕괴의 시발점이 될 수 있다’고 하더니 또 다른 청년이 찾아와 ‘당신이 십자가를 져달라’ ‘열사가 돼 달라’는 말로 내 죽음을 요구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후에도 같은 조직에 속한 사람들인지 알 수는 없지만 사람을 바꿔가며 몇 차례 나를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며 ‘미네르바의 자살’을 고리로 어떤 시나리오를 그려놓은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다만 박씨는 “이들이 소속된 단체나 이름을 들은 적이 없다. 정황상 ‘좌파단체 소속 청년들’이 아니겠느냐고 추정할 뿐”이라고 데일리안에 전했다.

그는 스스로 경제가 좋아 공부하고 그와 관련된 이런저런 글들을 올린 것이라며 대한민국 국민은 누구든 그럴 수 있는 것 아니냐며 답답해했다. 그는 “우파에서는 나를 ‘빨갱이’라고 하고, 좌파에서는 찾아와 자살하라고 하고, 당신 같으면 제 정신으로 살 수 있겠냐”고 했다.

그는 감옥에서 나온 이후의 생활에 대해서도 “최악이다”라고 표현했다. 아직도 그를 ‘가짜 미네르바’라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소송을 진행 중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미네르바 사건으로 가족도 파괴됐고 인간관계, 경제활동, 은행잔고 등 모든 게 파괴됐다고 했다. 

그는 “내가 사람을 죽였나. 사기를 쳐서 사람들 돈을 빼앗았나. 단지 인터넷에 글 쓴 이유 하나로 인생이 송두리째 망가졌다”고 데일리안과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는 “인터넷은 안 한다. 이제 인터넷은 보기도 싫다”고 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3/07/2011030702299.html

 

 


한나라당 틀어 쥔 '민중당'은 어떤 정당이었나?

2020-07-14 22:11:40 | 사회,정치(社会、政治)

한나라당 틀어 쥔 '민중당'은 어떤 정당이었나?

 

이들이 과연 국회에 들어가 친북좌파를 청산할 수 있을까?
金成昱   
 한나라당은 이번 공천에서 보수성향 중진은 물론 애국운동을 벌여온 右派인사를 배제해 버렸다.
 
 반면 90년대 초반 활동했던 민중당 출신이 주요 파벌로 떠올랐고, 李明博 대통령 참모로 활동해 온 386운동권 출신들도 대부분 공천됐다. 실로 左派출신이 한나라당 주류로 등장한 셈이다.
 
 이념은 감정이다. 안타깝게도 左派출신은 사상적으로 전향을 했어도 정서적으론 돌아서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한반도에서 끝나지 않은 냉전(冷戰)을 회피하고, 반공(反共)에 손사래 친다. 집단화 될 땐, 이런 현상이 극대화된다. 보통 땐 멀쩡하다가도 左派출신끼리 모이면 김일성주의 전력을 훈장처럼 들먹인다. 무엇보다 한나라당의 左派출신은 뉴라이트와 같은 최소한의 반성이나 재교육도 받지 않았다.
 
 이들이 과연 국회에 들어가 사회 곳곳에 만연한 친북좌파를 청산하고, 북한의 급변사태를 처리해 자유통일을 이뤄낼 수 있을까? 안타깝기만 하다.
 
 [자료. 한나라당 내 민중당 출신과 민중당의 실체]
 
 1. 한나라당은 최고 실세로 불리는 이재오(李在五) 의원과 경기도지사 김문수(金文洙) 의원이 각각 민중당 사무총장과 노동위원장 출신이다.
 
 한나라당 최종공천 결과, 李在五 의원 외에도 민중당 멤버였던 박형준(朴亨埈, 부산 수영), 정태윤(鄭泰允, 부산 남乙), 차명진(車明進, 부천 소사), 임해규(林亥圭, 부천 원미甲), 김성식(金成植, 서울 관악甲), 허숭(許崇, 경기 안산 단원甲)씨가 공천을 받았다.
 
 역시 민중당 활동을 했던 최유성(崔有成, 서울 금천), 노용수(魯龍洙, 경기 시흥甲), 최우영(崔佑榮, 남양주 乙), 조춘구(曺春九, 서울 성북乙)씨는 최종심사에서는 탈락했지만 1차 공천심사에서 통과됐었다.
 
 2. 민중당은 1990년 11월10일 공식출범했다.
 
 『민중의 수탈과 억압의 굴레를 박차고 일어나 분단(分斷)과 예속(隸屬)체제를 타파하겠다(발기취지문)』『외세(外勢)와 군사독재를 종식시켜 민중주체 민주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기본 목표로 삼겠다(창당선언문)』『민중의 역량을 결집해 독재(獨裁)권력과 독점(獨占)재벌, 외세(外勢)의 지배(支配)를 청산함(강령)』 등 민중당은 대한민국 사회를 미국의 식민지 상태로 인식했다.
 
 또 『민중주체 의회 제도를 정착시키고 재벌을 해체하며 기간산업 및 일정규모 이상의 토지를 국유화(國有化)한다』며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한편 『1단계로 남북한 간에 평화를 정착시키고, 2단계로 남북 地域정부의 자치권이 동등한 권한을 갖는 연방제(聯邦制) 방식의 통일국가를 창출하겠다(以上 민중당 발표 기본정책 中)』며 연방제 통일을 주장했다.
 
 민중당은 창당 이래 국가보안법 폐지를 줄곧 주장해 왔다. 92년 2월27일 총선공약에서는 국방비 획기적 감축, 예비군 및 민방위 폐지 등 국군의 무장해제와 함께 국보법 폐지를 공약으로 제시했다.
 
 민중당은 북한정권과의 공조에도 역점을 기울여왔다. 90년 8월3일에는 소위 북한의 정당 및 사회단체와 민족통일문제를 협의키 위해 30명에 달하는 북한방문대표단(단장 이재오 조국통일위원장)을 구성했다. 91년 2월23일에는 조선로동당의 초청을 수락해 방북을 결정하기도 했다.
 
 3. 親北·左派 노선을 걸어 온 민중당 당 간부들은 굵직굵직한 간첩사건에 거듭 연루돼왔다. 90년 10월 검거된 「남한사회주의 노동자동맹(사노맹)」 사건에는 이성수 민중당 인천 남동구지구당 사무장 등 다수의 당 관계자들이 검거됐다.
 
 92년 9월에는 다수(多數)의 민중당 간부 출신이 「남한조선로동당(남로당)」 사건에 연루된 사실이 밝혀졌다.
 
 남로당 사건은 해방 이후 최대 간첩사건으로서 민중당 前대표 김낙중(金洛中)을 주범으로, 민중당 前고문 권두영, 민중당 前조국평화통일위원장 손병선 등 주요 간부가 연루됐었다.
 
 金洛中은 36년간 간첩으로 암약하면서 북한으로부터 미화 2백10만 달러(한화 약 16억 원)를 넘겨받아 민중당 창당을 지원하고 장기표(張琪杓), 이우재(李佑宰) 등 민중당후보 18명의 선거자금에 사용했었다.

 

 

홍어 인민 공화국

 

분탕 수뇌부 회의

 

운동권 불량뇌


전설의 스파이 김동석

2020-06-29 09:04:15 | 사회,정치(社会、政治)

전설의 스파이 김동석

 

 

 전설의 스파이 김동석

 

 

 

  혹시 첩보영화 좋아하세요? 상상을 초월하는 최첨단 무기를 갖고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악당의 음모에 맞서 싸우는 첩보영화의 주인공은 누구나 한번쯤 꿈꾸어 보았을 동경의 대상입니다. 특히 첩보영화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007>의 주인공, 제임스 본드는 언제나 멋진 턱시도 혹은 슈트를 차려입고 값비싼 스포츠카를 운전하며 아름다운 여인들과 사랑을 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아무리 상상을 초월하는 강력한 적이 등장해도, 언제나 주어진 임무를 훌륭히 완수해 냅니다. 물론 예외도 있습니다만 <나폴레옹 솔로>에서 최근의 <트리플 X>까지 대부분 첩보영화 주인공들의 모습 역시 <007>의 주인공, 제임스 본드와 큰 차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진짜 첩보원들의 모습은 영화에서 묘사된, 화려하기까지 한 ‘영화 속 첩보원’의 모습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첩보영화의 대표작 007시리즈] 

 

 

   첩보원, 간첩, 스파이(Spy) 등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이들은 그 누구보다도 위험에 노출된 상태에서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숨겨진 영웅입니다. 첩보원이라는 임무 특성으로 인해 이들의 활약상이 일반에 알려지는 경우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들의 활약이 없었다면 현재의 역사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크게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숨겨진 영웅’ 중에는 ‘6·25전쟁의 4대 영웅’으로 칭송되는 고(故) 김동석 예비역 대령이 있습니다. 지난 해 3월 26일, 향년 86세로 별세한 고 김동석 애국지사는 우리나라 보다는 오히려 해외에서 더 많이 알려진 6·25전쟁의 영웅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분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고인은 철저한 비밀을 요구하는 첩보부대의 일원으로 6·25전쟁 기간 동안 생사를 넘나들며 보통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전공을 세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전공을 과시하거나 결코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고인에 대한 미국 정부의 재평가가 없었다면 아마도 고인의 활약상은 영원히 베일에 감추어 졌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고인에 대한 재평가는 지난 2003년 미국 정부가 정전협정(1953.7.27) 체결 50주년을 앞두고 1998년부터 2003년까지 5개년 계획으로 6·25전쟁 기념사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고인의 놀라운 활약에 놀란 미국 정부는 고인을 맥아더, 리지웨이 유엔군 총사령관, 백선엽 육군 대장과 함께 6·25전쟁 4대 영웅으로 선정했습니다. 그리고 2002년 5월 7일에는 경기도 의정부시에 위치한 미 제2보병사단 캠프 레드 클라우드 내 사단 전쟁박물관에 ’김동석 영웅실’이 만들어 졌습니다.

 

                           [북공작원의 대부 김동석 대령 회고록 ‘This Man']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고인의 회고록이 소개되는 과정에서 중견가수 진미령(본명 김미령)의 아버지라는 사실이 더 크게 부각되었다는 것입니다. 


 

 

                     [고 김동석 대령과 딸 가수 진미령씨(회록록 출판 기념회)]

 


  반대로 말해 만약 회고록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다면 6·25전쟁과 북파공작활동에 얽힌 고인의 활약상은 영원히 베일에 가려져있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럼 6·25전쟁 기간 중 고 김동석 대령의 활약상을 살펴볼까요? 육사 8기 출신인 고인은 제17연대 11중대장으로 6·25전쟁에 참여해 북한의 박성철이 지휘한 인민군 15사단을 전멸시킨 용맹한 지휘관이었습니다. 이 전공으로 전 장병 1계급 특진의 영예를 얻었으며 6·25전쟁 발발 3개월 후인 1950년 9월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소속 미군 연락장교로 발령받아 첩보세계에 처음 발을 디뎠습니다. 이후 고인은 육군정보부대(HID)의 정보장교로 6·25전쟁의 전환점이 된 인천상륙작전과 서울탈환작전 당시 결정적 첩보를 수집하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사실은 포로 심문과정에서 입을 굳게 다물고 있던 인민군 장교를 설득해 반격작전 뿐만 아니라 평양탈환에 필요한 결정적 정보를 얻어 냈다는 것입니다. 고인은 최초로 서울에 진주(進駐)한 인민군 105전차여단 1대대장 김 영 소좌가 포로로 잡히자 그를 설득해 결정적 정보를 얻어냈고 이 정보는 국군이 평양을 탈환하는데 큰 공헌을 했습니다. 이후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은 고인은 육군첩보부대 1사단 지구대장을 거쳐 1952년부터 1961년까지 동해안 첩보업무를 담당한 제36지구대를 이끌었습니다. 휴전협정으로 인해 전선에서의 직접적인 충돌은 거의 중단되었지만 적진 후방에 침투해 정보를 수집하고 적을 교란하는 첩보작전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습니다. 

 

 

                                                    [북파공작원]

 


  휴전 이후에도 동해안 일대에서 북파공작업무를 진두지휘한 고인은 치밀한 계획을 바탕으로 1954년 2월 강원도 통천 부근 원산만에서 인민군 사단장 이영희를 생포, 납치했습니다. 지금 기준으로 보아도 불가능한 임무를 완수해 낸 것입니다. 만약 정보부대원들의 고인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용기, 조국 통일에 대한 열망이 없었다면 이 임무는 결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고인은 적군에게는 공포를, 아군에게는 절대적 신뢰의 대상이 됩니다. 정보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전공을 세운 고 김동석 대령은 1961년 육군대령으로 예편하고 정든 군복을 벗었습니다. 그러나 국가는 남다른 능력을 갖춘 그를 다시 불렀습니다.


  민간인 신분이 되었지만 국가에 대한 고인의 충성은 한 치 흔들림이 없었고 삼척시장을 시작으로 강릉시장, 속초시장, 목포시장, 수원시장, 함경북도지사 등 행정가로서도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공직생활을 끝마친 이후에도 대한유도회 부회장(유도8단)과 한·미 친선골프회 회장 등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고 김동석 대령은 1923년 8월 함경북도 명천 칠보산 기슭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대한민국 독립 전에는 중국 국민당 애국의용대 부대장과 백범 김구선생 경호원 등을 역임한 독립투사이기도 합니다. 물론 고 김동석 대령은 과거 독립활동, 국군 첩보부대장교로서의 활약 등을 고인의 회고록이 출판된 이후에야 알게 되었다는 지인들이 많을 정도로 과묵한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공적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부하들의 공적을 더욱 빛나게 만든 영웅 고 김동석 대령. 고인은 지난 해 3월 26일 오후, 향년 86세로 별세했고 고인의 유해는 3일 뒤 국립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우리보다도 오히려 미국 정부에 의해 6·25전쟁 4대 영웅으로 추대된 고 김동석 대령은 이 시대의 진정한 영웅입니다. 6·25전쟁 발발 60주년을 맞은 올해, 이 땅의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헌신한 수많은 영웅들과 무명용사들의 희생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역사에 부끄럽지 않은 후손들이 되기 위해 우리 스스로 반성하고 잊혀진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하지 않을까요? 거짓 영웅이 판치는 지금, 진정한 영웅을 찾아내고 역사를 바로 세우는 것은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바로 여러분의 몫입니다.

  
 

전전통님! 자서전에 가장 중요한 진실들은 빼먹고 거짓말만 늘어놓으셨네요.(2번글)

2020-05-06 19:54:27 | 사회,정치(社会、政治)

전전통님! 자서전에 가장 중요한 진실들은 빼먹고 거짓말만 늘어놓으셨네요.(2번글)

 

 솔창의향기
2017.03.31 23:27:55 (*.62.*.64)

 


앞에 글에서 헌법에 대해 서두만 꺼내고 중단하니 상당히들 궁금했던가 보네요.

하지만 거기에 대해 언급하기에 앞서 당신의 측근이 공개했다는 자서전의 내용이 뉴스와 인터넷을 타고 일파만파 퍼져나가 개돼지들을 오염시키기에 이것부터 바로잡고자 합니다.





다음은 최태민과 당시 영애였던 박근혜와의 관계에 대해 언론에 공개된 내용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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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씨 측에 따르면 세권 짜리 회고록 중 박근혜 전 대통령 관련 내용은 대부분 3권에 실릴 전망입니다.
그리고 그중엔 "10·26 사건 이후 각종 비행을 일삼던 최태민 씨를 전방 군부대에 격리 조치했다"는 내용도 포함돼있습니다.



"최 씨가 당시 박근혜 영애를 등에 업고 많은 물의를 빚으며 박정희 전 대통령을 괴롭혀 온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이어 전 씨는 최 씨를 따로 처벌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면서 "그의 행적을 캐다가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유족들의 명예에 손상을 줄까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회고록에선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뭉칫돈을 전달한 사실도 다시 거론됐습니다.

"김계원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 방에서 나온 대통령 개인자금 9억5000만 원을 전달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이 이 가운데 3억5000만원을 10·26 수사비에 보태라며 돌려줬다"는 겁니다.



또 전 씨는 "대통령직은 박 전 대통령의 여건과 능력으로는 무리한 욕심이라고 생각했다"고 평가했습니다.

[출처] 전두환 회고록 - 최태민과 박근혜에 대해 언급.
[링크] https://www.ilbe.com/9616492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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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여전히 국민들을 당신수준인 개돼지로 알고 있군요.
일국의 대통령까지 지낸분이 너무나 치졸하다는 생각은 안해보셨냐요?


이 글로 인해 무려 40년의 나이 차이가 나는 최태민과 박근혜간에 어떤 오해의 소지를 갖게 하지요.

당신의 주장이 조금만 생각있는 사람이라면 너무나 엉터리라는 것을 아주 상식적인 선에서 반박해 보지요.



돈문제는 본인도 시인한 것이니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고, 10.26이후 박근혜가 무슨 정신이 있고 권력이 있어 최태민이 박근혜를 등에 업고 비행을 일삼았을까요?
당신들이 격리하다시피 했고 아무런 실권도 없이 청와대에서 쫒겨나 신당동 자택에 머물고 있었을 텐데 비리를 저지를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부친을 잃고 오직 생각하는건 “아버지의 죽음의 진실은 무엇일까?” 하는것이었겠지요.
이건 개돼지가 아닌 인간이라면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지극히 상식적인 일입니다.



또한 최태민이 박근혜와 만나 가깝게 지낸건 1975년 부터였지요.
모친을 잃고 충격에 빠져 있을때였고, 부친인 박정희대통령은 부인을 잃은 슬픔과 미국정부의 압력과 미국을 등에 업고 유신체제에 반발하는 국내상황에 압박을 받아 거의 매일 술에취해 인사불성으로 지냈고 이를 더욱 부추긴건 차지철이었다는 기록이 있지요.



최태민목사는 당연히 술도 안하고 아마도 청와대 출입인원중 가장 맨정신에 가까운 사람이었겠지요.
그런 사람이 대통령 시해와 관련해 아무런 낌새도 느끼지 못했을까요?


당시 박근혜는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고 있었다지만 나이도 어리고 세상경험도 부족해 의지하고 있던 최태민 목사에게 부친의 시해에 관한 비밀에 대해 캐물어봤을테고 진실이 밝혀지는것이 두려운 당신이 최태민을 군부대에 격리시켰겠지요.



5년간이나 모친을 대신해서 퍼스트레이디를 하다 갑자기 대통령인 부친이 시해 당했는데 관심을 가지고 그 원인을 알고자 하는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차라리 당신이 자서전에 “부친의 죽음에 너무 집착해 혹시나 정신적으로 잘못될까봐 그녀에게 잘못된 조언을 해주는 최태민을 전방부대에 격리시켰다.”고 했다면 수긍을 하겠네요.


하지만 당신의 자서전 내용을 본다면 오히려 당신이 사전에 박대통령 시해음모를 알고도 이를 방치하지 않았나 의심이 드네요.
딸이 아버지의 죽음에 의문을 가지고 조사하는건 당연한데 뜬금없이 최태민이 영애를 등에 업고 물의를 일으켰다는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더구나 갑자기 모친에 이어 부친까지 잃은 사람을 나이차이가 40년이나 나는 사람과 이상한 방향으로 엮어 “"그의 행적을 캐다가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유족들의 명예에 손상을 줄까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건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소리지요.

거짓말을 하려면 좀 더 그럴듯하게 하세요.
주위에 사람이 얼마나 없으면 그런 말같지도 않은걸 자서전이라고 쓰다니 참으로 한심하군요.


또한 "대통령직은 박 전 대통령의 여건과 능력으로는 무리한 욕심이라고 생각했다"며 출마를 만류했다고 했는데 그게 아니고 그녀가 대통령이 되는게 겁이 나서였겠지요?  
그녀가 대통령되서 처음 한일중에 하나가 그동안 납부하지 않았던 당신들의 추징금을 모조리 거둔 것이지요. 
"너는 자격없어 대통령 못된다."할 정도였으면 "역대정권 어느 누구도 추징금 내란 소리 못했는데 네가 뭔데 내라고 하냐"고 호통쳤겠지요.






또한 당신은 대통령 시해발표에서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이유가 “스스로 대통령이 되기위한 단독범행”이라고 발표했는데 차라리 문세광이 대통령되기 위해 대통령 시해하려했다고 한다면 오히려 믿겠네요.




김재규의 단독범행이 아니라는 근거는...
1) 당시 유신헌법상 대통령에 출마하려면 대통령 권한대행인 최규하의 승인이 있어야만 하지요. 최규하의 승인이 없이는 절대로 대통령에 출마할 수 없었답니다.



2) 비서실장을 하던 김계원이 회고록에서 시해당일날밤 8시 30분경에 국무총리인 최규하를 찾아가 “김재규가 대통령 시해범이다. 체포해야 한다.”고 보고 했지만 묵살당했고, 그 후에 재판과정에서도 보고했던 사실을 최규하가 부인해 사형선고까지 받았었다.“고 증언하고 있지요. 이건 내 추측이 아니고 김계원의 회고록 내용이니 확인해 보세요.
( 더 자세한 내용은 몇넌전에 썼던 “10.26의 숨겨진 비밀”이던가 하는 글에 있으니 읽어보세요. 제목도 생각이 안나네요.)



철면피짓 그만하고 국민앞에 역사의 진실을 밝히세요.
당신이 빨갱이들에게 넘겨주어 30여년간을 고통받고있는 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625 참전국 만큼은 아니지만 많은 나라들이 모여 최후의 심판일(dooms day)의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동안 꽁꽁 숨겨왔던 모든 추악한 비밀들이 백일하에 들어날 순간이 다가오고 있지요.



박근혜대통령이 탄핵되고 구속까지 되니 그동안 조려왔던 마음이 홀가분해지고 당신을 협박해 나라를 빼앗은 빨갱이들이 여전히 당신을 보호해 줄거라 생각하고 이따위 글을 쓰는지 모르지만 그들은 결코 당신을 보호해 줄 수가 없습니다.

그때의 비밀들이 들어나면 그들이 당신들을 입막음하기 위해 만들었던 법률 5028호가 올가미가 되어 당신들을 교수대로 올리고 말 것입니다.


당신이 살 수 있는 길은 국민앞에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당신의 더러운 목숨을 건지기 위해 빨갱이들에게 팔아먹은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되찾는데 앞장서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전전통님! 자서전에 가장 중요한 진실들은 빼먹고 거짓말만 늘어놓으셨네요.(1번글)

2020-05-06 19:47:43 | 사회,정치(社会、政治)

전전통님! 자서전에 가장 중요한 진실들은 빼먹고 거짓말만 늘어놓으셨네요.(1번글)

 

 솔창의향기
2017.03.31 00:14:38 (*.62.*.202)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되어 물러나니 이제 안심이되나 보지요?
잽싸게 자서전이라고 내놓은걸 보니 국민들 수준을 너무 우습게 보신것 아닌가요?


먼저 매스컴마다 떠드는 얘기;
박근혜후보가 도와달라고 했을때 대통령할 능력이 없어 반대했다고 하셨는데 말은 바로 해야지요.
능력이라면 블룸버그 선정 4년연속 1위라는건 과거 어느 정권도 이루지 못한 업적이지요.
그밖에 다른 얘기는 않겠습니다.



능력이 없어 반대한게 아니고 그녀가 대통령하는게 너무 두려워서 반대했다고 해야 맞지요.
대통령 되어서 그녀가 맨먼저 한일중에 한가지가 과거 어느 정권도 하지 못한 추징금 몽땅 징수했잖아요?
“너는 능력 없으니 대통령 하지마라.”고 할 정도 되면 당연히 “네까짓게 뭔데 과거 정권들도 찍소리 못한 추징금을 내라 하냐?” 이게 맞지 않나요?

그거야 뭐 사소한 일이니 그냥 넘어가자구요.




제일 중요한 문제들을 한가지씩 집고 넘어가지요.
아무리 식물인간이 되어 누워있다고 해도 동기생인데 노전통한테 그렇게 뒤집어 씌우면 안되지요.
당신은 직선제 하려고 하는데 노전통이 적극적으로 말렸다고 했잖아요?
왠지 맞는얘기 같은데 증인들이 너무 많아서 금방 들통날 거짓을 얘기하네요.



무슨 얘기냐구요??
바로 1987년 6월 28일날 밤에 일어난 얘기지요.
629선언 전날밤이니까 기억하기도 좋을겁니다.
바로 그날밤 24시에 수도권지역에 위수령을 발령해서 민주화세력들 싹 잡아들일 계획을 세웠었잖아요?
아마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중에 꽤나 많은 사람들이 그날밤의 일을 기억할 겁니다.


소문으로는 629선언이 동기생을 배려한 통큰결단이라고 알려졌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지요.

지금의 세종연구소자리가 바로 당신이 퇴임해서도 상왕노릇을 하려고 마련한 아태재단 아닙니까?
그리고 1988년 11월 2일날 열린 5공청문회가 무엇 때문에 일어난건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지요.


그 당시까지 군의 지지세력을 등에 업고있던 당신이 또다시 쿠테타를 일으킬까봐 감행한 인민재판 이었지요.
그 결과 부산지역의 대학생부터 시작해서 대학생들이 들고 일어났고 당신 부부는 할수없이 모든 재산을 헌납한다고 하고 29만원만 남겨놓고 백담사로 들어갔잖아요?
그러니 통큰 배려니 동기생에 대한 우정이니 하는 소리는 몽땅 견공왈이지요.



바로 그날밤 비상발령을 불과 서너시간 남겨놓고 당시 민정당 총재인 노태우 총재가 청와대를 방문하여 상당히 심각한 얘기들이 오고 갔지요.
그후 비상발령이 취소되고 다음날 아침 629선언이 있었지요.

과연 그날밤 두분간에 무슨 얘기가 오갔기에 권력의 화신이었던 당신이 꼬리(?)를 바싹 말고 그야말로 죽은듯이 지냈을까요?




그날 나누었던 얘기는 너무나 흥미진진하여 조금 아껴두고 지금 온세계의 지탄이 되고있는 사기탄핵의 원인이된 헌법제정 얘기부터 하지요.
당신의 손으로 그때 제정된 헌법이 지금 박근혜 대통령을 사기탄핵시켜 쫒겨나게 한 바로 그 악마의 헌법이지요.

그 헌법을 보면 “땡전”이란 별명을 들을 정도로 권위적이던 당신이 만든 헌법이라고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이상한 것이었지요.
3권분립이 가장 중요한 민주주의의 원칙임에도 불구하고 국회에만 대통령 탄핵권을 주고 대통령에게는 국회를 견제할만한 아무런 권한도 없는 절름발이 헌법을 만든게 바로 당신이지요.



더구나 당신손에 의해 헌법을 개정하고 공포까지만 하고 시행은 다음대통령 취임일인 1988년 2월 25일부터 하도록 되어 있으니 뭔가 아주 좋은것 만들어놓고 당신만 왕따시키고 자기들끼리 해먹으려는 수작같지 않나요?

글이 너무 길어져서 읽는 사람들이 지루하겠네요.
다음엔 그 헌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얘기해 보지요. (2번글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