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첩보영화 좋아하세요? 상상을 초월하는 최첨단 무기를 갖고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악당의 음모에 맞서 싸우는 첩보영화의 주인공은 누구나 한번쯤 꿈꾸어 보았을 동경의 대상입니다. 특히 첩보영화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007>의 주인공, 제임스 본드는 언제나 멋진 턱시도 혹은 슈트를 차려입고 값비싼 스포츠카를 운전하며 아름다운 여인들과 사랑을 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아무리 상상을 초월하는 강력한 적이 등장해도, 언제나 주어진 임무를 훌륭히 완수해 냅니다. 물론 예외도 있습니다만 <나폴레옹 솔로>에서 최근의 <트리플 X>까지 대부분 첩보영화 주인공들의 모습 역시 <007>의 주인공, 제임스 본드와 큰 차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진짜 첩보원들의 모습은 영화에서 묘사된, 화려하기까지 한 ‘영화 속 첩보원’의 모습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첩보영화의 대표작 007시리즈]
첩보원, 간첩, 스파이(Spy) 등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이들은 그 누구보다도 위험에 노출된 상태에서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숨겨진 영웅입니다. 첩보원이라는 임무 특성으로 인해 이들의 활약상이 일반에 알려지는 경우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들의 활약이 없었다면 현재의 역사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크게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숨겨진 영웅’ 중에는 ‘6·25전쟁의 4대 영웅’으로 칭송되는 고(故) 김동석 예비역 대령이 있습니다. 지난 해 3월 26일, 향년 86세로 별세한 고 김동석 애국지사는 우리나라 보다는 오히려 해외에서 더 많이 알려진 6·25전쟁의 영웅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분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고인은 철저한 비밀을 요구하는 첩보부대의 일원으로 6·25전쟁 기간 동안 생사를 넘나들며 보통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전공을 세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전공을 과시하거나 결코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고인에 대한 미국 정부의 재평가가 없었다면 아마도 고인의 활약상은 영원히 베일에 감추어 졌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고인에 대한 재평가는 지난 2003년 미국 정부가 정전협정(1953.7.27) 체결 50주년을 앞두고 1998년부터 2003년까지 5개년 계획으로 6·25전쟁 기념사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고인의 놀라운 활약에 놀란 미국 정부는 고인을 맥아더, 리지웨이 유엔군 총사령관, 백선엽 육군 대장과 함께 6·25전쟁 4대 영웅으로 선정했습니다. 그리고 2002년 5월 7일에는 경기도 의정부시에 위치한 미 제2보병사단 캠프 레드 클라우드 내 사단 전쟁박물관에 ’김동석 영웅실’이 만들어 졌습니다.
[북공작원의 대부 김동석 대령 회고록 ‘This Man']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고인의 회고록이 소개되는 과정에서 중견가수 진미령(본명 김미령)의 아버지라는 사실이 더 크게 부각되었다는 것입니다.
[고 김동석 대령과 딸 가수 진미령씨(회록록 출판 기념회)]
반대로 말해 만약 회고록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다면 6·25전쟁과 북파공작활동에 얽힌 고인의 활약상은 영원히 베일에 가려져있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럼 6·25전쟁 기간 중 고 김동석 대령의 활약상을 살펴볼까요? 육사 8기 출신인 고인은 제17연대 11중대장으로 6·25전쟁에 참여해 북한의 박성철이 지휘한 인민군 15사단을 전멸시킨 용맹한 지휘관이었습니다. 이 전공으로 전 장병 1계급 특진의 영예를 얻었으며 6·25전쟁 발발 3개월 후인 1950년 9월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소속 미군 연락장교로 발령받아 첩보세계에 처음 발을 디뎠습니다. 이후 고인은 육군정보부대(HID)의 정보장교로 6·25전쟁의 전환점이 된 인천상륙작전과 서울탈환작전 당시 결정적 첩보를 수집하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사실은 포로 심문과정에서 입을 굳게 다물고 있던 인민군 장교를 설득해 반격작전 뿐만 아니라 평양탈환에 필요한 결정적 정보를 얻어 냈다는 것입니다. 고인은 최초로 서울에 진주(進駐)한 인민군 105전차여단 1대대장 김 영 소좌가 포로로 잡히자 그를 설득해 결정적 정보를 얻어냈고 이 정보는 국군이 평양을 탈환하는데 큰 공헌을 했습니다. 이후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은 고인은 육군첩보부대 1사단 지구대장을 거쳐 1952년부터 1961년까지 동해안 첩보업무를 담당한 제36지구대를 이끌었습니다. 휴전협정으로 인해 전선에서의 직접적인 충돌은 거의 중단되었지만 적진 후방에 침투해 정보를 수집하고 적을 교란하는 첩보작전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습니다.
[북파공작원]
휴전 이후에도 동해안 일대에서 북파공작업무를 진두지휘한 고인은 치밀한 계획을 바탕으로 1954년 2월 강원도 통천 부근 원산만에서 인민군 사단장 이영희를 생포, 납치했습니다. 지금 기준으로 보아도 불가능한 임무를 완수해 낸 것입니다. 만약 정보부대원들의 고인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용기, 조국 통일에 대한 열망이 없었다면 이 임무는 결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고인은 적군에게는 공포를, 아군에게는 절대적 신뢰의 대상이 됩니다. 정보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전공을 세운 고 김동석 대령은 1961년 육군대령으로 예편하고 정든 군복을 벗었습니다. 그러나 국가는 남다른 능력을 갖춘 그를 다시 불렀습니다.
민간인 신분이 되었지만 국가에 대한 고인의 충성은 한 치 흔들림이 없었고 삼척시장을 시작으로 강릉시장, 속초시장, 목포시장, 수원시장, 함경북도지사 등 행정가로서도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공직생활을 끝마친 이후에도 대한유도회 부회장(유도8단)과 한·미 친선골프회 회장 등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고 김동석 대령은 1923년 8월 함경북도 명천 칠보산 기슭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대한민국 독립 전에는 중국 국민당 애국의용대 부대장과 백범 김구선생 경호원 등을 역임한 독립투사이기도 합니다. 물론 고 김동석 대령은 과거 독립활동, 국군 첩보부대장교로서의 활약 등을 고인의 회고록이 출판된 이후에야 알게 되었다는 지인들이 많을 정도로 과묵한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공적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부하들의 공적을 더욱 빛나게 만든 영웅 고 김동석 대령. 고인은 지난 해 3월 26일 오후, 향년 86세로 별세했고 고인의 유해는 3일 뒤 국립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우리보다도 오히려 미국 정부에 의해 6·25전쟁 4대 영웅으로 추대된 고 김동석 대령은 이 시대의 진정한 영웅입니다. 6·25전쟁 발발 60주년을 맞은 올해, 이 땅의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헌신한 수많은 영웅들과 무명용사들의 희생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역사에 부끄럽지 않은 후손들이 되기 위해 우리 스스로 반성하고 잊혀진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하지 않을까요? 거짓 영웅이 판치는 지금, 진정한 영웅을 찾아내고 역사를 바로 세우는 것은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바로 여러분의 몫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