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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支那)의 식인문화 (정말 공자님은 인육을 쳐 드셨던 걸까요?)

2020-01-27 10:01:57 | 식인종 지나(支那食人文化)

 

지나(支那)의 식인문화 (정말 공자님은 인육을 드셨던 걸까요?)

 

강태희

2003.12.20 23:29:17 (*.181.103.201)

 

 

 

<< 눈 덮인 들길 걸어갈 제 행여 그 걸음 아무렇게나 하지 말세라, 오늘 남긴 내 발자국이 마침내 뒷사람의 길이 되리니...(書 - 백범 김구, 作 - 서산대사) >>

아래의 있는 글은 다음카페에 올라와 있던 글입니다. 
정말 공자님은 인육을 드셨던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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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나(支那)의 식인문화 >>
 
대만의 사학자 황문웅은 지나(支那)의 식인문화는 5천년을 관통하며 지속되고 있고 식인문화를 알지 못하고서 지나(支那)의 역사와 문화를 논한다는것은 있을수 없는일이며 지나(支那)인의 보편적인 사고방식도 이해할수 없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왜 지나(支那)인은 서로를 믿지 못하고 부모자식간에서 배신을 하는가? 왜 지나(支那)인은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게 잔인한가? 왜 지나(支那)는 지나(支那)특유의 대가족주의가 발달했는가 등등.. 이모든것이 식인문화와 관련이깊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식인문화로 인한 폐해와 지나(支那)인들의 사고에 미친 악영향을 노신은 광인일기를 써서 정면으로 비판했죠. 

 
 
지나(支那)사람이 아닌 외국인이 지나(支那)의 식인문화에 대해 심도 있게 연구를 한 사람들은 바로 일본인들입니다. 그들은 이 식인문화 연구를 통해 지나(支那)인의 특성을 잘 간파하고 있었고 이를 대지나(支那) 전략을 짜는데 기본지식으로 활용했습니다. 우리는 바로 옆나라에 살면서도 지나(支那)의 식인문화가 존재했는지 조차도 모르고 그것이 지나(支那)사람들의 사고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게 한국인과 일본인들의 차이가 아닐까요? 여기 계신 분들이 허락하신다면 제가 알고 있는 지나(支那)의 식인문화를 연재형식으로 차례대로 올릴까 하는데 허락해주시면 하루나 이틀에 한개정도 제가 시간이 날때마다 정리해서 올리고자 합니다. 
 
 

 

 

지나(支那)의 식인문화는 미개종족의 식인문화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확실히 지나(支那)의 식인문화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의 역사와 정치,문화 지나(支那)인의 사고방식에 미친 영향은 엄청납니다. 왜 지나(支那)인들이 서로를 믿지 못하며 부모자식간에도 안믿는지.. 식인문화를 살펴보면 이해가 가실것입니다. 또 입으로는 예를 외치면서도 같은 입으로 사람을 잡아먹는 그들의 심리상태토 이해가 가실겁니다. 연재해도 좋다는 리플이 있으면 연재를 시작할까 합니다. 그럼 건강하십시요. 

 

 

식인종으로 알려진 마사이족 여자들이 뇌가 석회화되어 죽는 경우가 많다는 것으로 세계보건기구에 보고되었다. 그 원인을 찾기 위해 역학팀을 보내 연구했더니 그들의 식인풍습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사람고기는 제일 좋은 부분부터 남자, 노인, 어린이 차지가 되고 가장 먹기 어려운 골수나 뇌부분을 여자들이 먹기 때문이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 식인문화가 생겨난 배경

 
 
 

1.격한쟁투에 따른 가혹한 형벌제도의 탄생 

 
지나(支那)의 역대 황제들은 율령에 의해서 성문법을 규정했습니다. 중원을 둘러싼 격렬한 쟁투는 잔혹한 보복을 낳았고 잔혹한 형벌제도를 탄생시켰습니다. 이 잔혹한 형벌들은 지나(支那)의 식인문화를 정당화시키는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전세계에 유래가없는 황제의 명령에 의한 인간1의 고기를 먹거나 먹이게 하는 "식육의 형벌" 이 그것이며 그 잔혹한 형벌은 놀랍게도 성문법으로 규정되어 버렸습니다. 
 
 

 

예를 들어 주나라시대에는 중죄인에게 5가지 형벌을 내리는데 묵형, 비형, 궁형, 월형, 살형이 성문법으로 규정되었습니다. 묵형은 이마에 먹으로 죄인의 문신을 새기는것이고 궁형은 거세를 시키는 형이며 월형은 다리를 자르는형입니다. 사상가인 묵자는 묵형을 받았고 사마천은 궁형을 그리고 병법의 대가인 손자는 월형을 받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그 형벌은 더 잔혹해지고 가짓수도 대폭적으로 늘어나 나중에는 여자의 생식기를 틀어막아 버리는 형벌까지도 생겨나게 됩니다. 그리고 드디어 식육의 형벌이 성문법으로 기록되어 실시되게 되며 이는 전 중국인의 식인풍습을 확산시키는데 기폭제 역활을 하게 됩니다. 

 
 
 

 

2.지나(支那)의 역사는 살인의 역사 

 
지나(支那)의 역사상 대규모적인 내란은 진시황제 이후 1920년까지 160차례이고 소비된 기간은 896년입니다. 즉 3년에 1년은 내란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봉건영주간의 침탈전쟁은 448차례에 이르고 대규모 전쟁은 222차례입니다. 소비된 기간은 이루 말할수 없을정도지요. 
 
 

 

근대에 이르면 이러한 양상은 더욱 격해집니다. 중화민국 정권수립이후 22년 동안 7백회의 내전이 발생했고 그중 사천성에서만 5백회이상이 발생했습니다. 이를 두고 모택동은 지나(支那)를 방문한 알바니아 군사대표단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나(支那)인을 가르켜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 했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우리는 투쟁과 전쟁을 사랑하는 민족이다." 

 
 

양계초라는 인물은 지나(支那)인을 육민(戮民)이라 칭했는데 이는 전란에 의한 살육사의 비율이 굉장히 높은 국민이란 뜻입니다. 내란과 기근이 덮칠때마다 소,돼지처럼 죽어가는것이 역사의 숙명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은 1989년 천안문 사태에서 또다시 한번 증명됩니다. 

 

 

 

 

3.역사상 유래를 찾을수 없는 천재지변과 기근 

 
등운특이란 사람이 지은 지나(支那) 구황사란 통계에 의하면 지나(支那)는 기원전 18년 부터 1937년 까지 수해, 한발, 메뚜기창궐, 우박, 태풍, 지진, 대설등의 전채만 5천 2백여차례가 있었다고 발표했습니다. 즉 평균 6개월마다 1차례의 재해가 일어났음을 의미합니다. 

가혹한 형벌체계의 발전과 성문법화, 그리고 전란의 역사, 그리고 기근의 역사, 대개 심한 기근이 들었을때 전란이 발생하는점을 두고보면 그때의 식량사정이 어떠했을런지는 어렵지않게 짐작이 가시리라 생각되어 집니다. 

지나(支那) 정사 중 사기(史記)를 비롯한 이십육사등에 기록한 전란, 기근, 형벌로 인한 식인풍습은 220여차례가 기록되고있고 자치통감, 속자치통감, 명통감, 문헌통고, 속문헌통고, 등등의 자료에 기록된 식인풍습까지 계산하면 거의 셀수가 없을정도의 식인사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나(支那)의 식인문화(3) 유교와 지나(支那)인의 식인의 관계 

 
지나(支那)인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들의 역사를 알아야하고 그것이 그들 사고와 가치 및 문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직접 그들과 부딪히며 배워나가야 하겠죠. 

식인문화는 지나(支那)의 고유문화이며 이를 잘 이해하면 지나(支那)인의 사고방식과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되어서 입니다. 이 연재글이 불쾌하시다면 연재를 중단할 계획입니다만.. 중단하라는 리플이 없는한 계속할 작정입니다. 

먼저 식인문화에 대한 전반을 살펴보고 그것이 지나(支那)인의 가족주의, 대인관계, 중화사상, 기업문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나름대로 분석하고 그것을 연재하려 합니다. 

지나(支那)의 식인문화가 발달하게 된 배경에는 중원을 둘러싼 격한 쟁투에 따른 잔혹한 형벌제도의 탄생과 사람을 잡아먹는 형벌이 성문법으로 제정되어 법적으로 허용되었다는점과 세계에서 유래를 찾을수없는 잦은기근과 천재지변, 전쟁, 농업기술낙후로 인한 식량부족등이 한대 맞물리면서 확산되었다는것입니다. 

법적으로 식인이 허용되고 식량부족에 기근, 전란이 잦아들면서 차츰 식인문화는 아무 저항감 없이 지나(支那)민중에게 뿌리 박히게 되었던것 같습니다. 따라서 정쟁, 전쟁에서 패배한 정적, 적국군병 및 국민등은 "잡아 먹히는 인육"이 되는것은 너무도 당연했고 상황에 따라선 자국국민을 임의로 대량 징발해서 하루에 수천명씩 군대의 식량으로 사용되어진것도 지나(支那)역사를 살펴보면 결코 보기 드문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와 인의를 강조하는 유교도 이에 한몫을 단단히 했습니다. 

왜냐면.. 공자역시 정당한 복수를 칭송하였기 때문입니다. 지나(支那)에서 왜 유교가 발달할수 밖에 없었던 이유도 식인문화와 관련깊습니다. 춘추전국시대에 떠도는 말중에 하나가 "만일 사람을 잡아먹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사람이 바로 성인(聖人)이다" 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말은 그만큼 식인문화가 널리퍼져 있었고 모든 지나(支那)인이 사람을 "즐겨" 먹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회분위기가 그런 상태였기 때문에 "예"와 "도덕"이 강조되어질수 밖에 없었고 그런 사회분위기 하에서 유교가 발달 했습니다. 
 
 

 

 

 

지나(支那)의 식인문화(4)지나(支那) 식인문화의 3대특징

 
1)지나(支那)문명의 발전과 그 식인문화의 전파는 그 족적이 일치한다. 
식인문화의 시작은 거의 대부분이 황하유역의 산동, 하남, 하북, 산서, 섬서성이 중심이었습니다. 시대가 흐름에 따라 점차 남쪽으로 남하해가는 특징을 찾을수 있습니다. 이어 식인문화는 지나(支那)문화의 전파에 따라 남하하여 회화유역에서 장강을 넘어 산동, 복건성으로 파급되어 집니다. 

그 파급경로는 지나(支那)인들의 강남개발과 이주의 역사와 함께 합니다. 즉 지나(支那)인이 많이 이주하면 인구가 급증하고 과잉개발에 의해 자연환경이 파괴되며 자연생태학적 균형이 깨어져 기근이 발생하고 식인현상이 발생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한나라 시대 고조 2년 부터 흥평원년에 이르는 400년 도안 식인현상은 대부분 지나(支那)문명의 시작인 황하에서만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흥평 2년 이후에는 장강, 황하일대에서도 발생하고 강남, 광동, 복건성에서 식인현상이 나타는것은 지나(支那)세력이 남하한 3-4세기 이후 동진시대 이후가 됩니다. 

2)인구과밀지역과 일치한다. 
식인현상은 대부분 인구과밀지역과 일치해서 발생합니다.변경지역이나 미개발지역이 아닌 인구 과밀 개발지역에서 출현합니다. 특히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인 장안, 낙양, 개봉, 북경, 남경, 양주, 항주등의 도시가 식인문화의 다발지역임은 주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3)정치환경변화와의 인과관계가 있다. 
노신은 고대 지나(支那)국가 성립이후의 사회를 "사람이 사람을 먹는 역사사회" 라고 못을 박았습니다. 즉 노신이 말하고자 했던것은 국가라고 하는 사적인 권력에 의해 구축된 고대국가 폭력기관이 광대한 대중을 국가라고 하는 우리에 가두고 수탈의 대상으로 삼고 우리 속의 극빈한 군중은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작용을 통해서 인구와 식량의 자동제어를 하고 자생자멸해간 결과를 이루어냈다고 하는것입니다. 

노신은 수탈의 가혹화와 인구 과밀화가 가져온 식량위기 및 자연-사회환경의 악화가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사회를 형성하고 지나(支那)의 식인문화를 창출했다고 주장합니다. 


다음편에는 식인문화를 충성심으로 미화하는 케이스를 살펴보고 식인문화를 정당화 그리고 더 나아가 미화하고 칭찬하며 여러 사람에게 본받게 함으로써 식인문화를 더욱더 부추긴 역사를 소개하고져 합니다. 
 
 

 

 

 

 

지나(支那)의 식인문화(5) 역사에 기록된 지나(支那)인의 식인

 

 

지나(支那)에서는 기원전 206년부터 19C초까지의 식인기록이 정사에 200여개가 넘게 기록되어져 있다.사기(使記)에서는 은 왕조(지나(支那)최초의 왕조)의 마지막 임금 주왕이 자신의 신하들을 해, 포, 자로 만들어 먹었다고 한다. 춘추시대 노나라 사람인 공자는 '해'를 좋아해서 식탁에 '해'가 없으면 식사를 하지 않았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던 중 위나라의 신하로 공자가 총애하는 제자 자로가 권력다툼에 밀려 처형되었고 그의 시신이 '해'로 만들어져 공자의 식탁에 올려졌다. 그 날 이 후 공자는 해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육요리분류 해 : 인육을 잘 게 썰어 소금에 절인 고기 포 : 인육을 저며서 말린 고기 자 : 인육을 구워서 익힌 고기 


본초강목(本草綱目) : 인체 각 부위의 약효에 대해 기록 
철경록(輟耕錄) : 송나라 말기에서 원대에 이르는 시대의 인육 요리법을 기록한 책 
진수의 삼국지(三國地) 
- 현덕 유비가 '포'를 즐겨먹었으며 여포의 시신을 죄인들에게 먹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 지나(支那) 정사에 나타난 식인의 시초
 

 

어제는 은나라시대의 식인사례를 게재했습니다만 그것은 정사에 기록된 사례는 아닙니다. 오늘은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즉.. 정사에 최초로 기록된 식인사례를 올리고자 합니다. 은왕조의 주(紂)왕은 대신인 구후의 딸이 절세미인이란 말을 듣고 아내로 삼았는데 그 아내가 너무도 정숙하고 외설을 좋아하지 않아 자신의 성적취향에 맞지않자 격노하고 그녀를 살해하고 그녀의 아버지 구후를 해(소금에 절인 육젓)으로 만들어 먹어버립니다. 

신하인 곽후가 이를 강력히 말리자 주왕은 곽후를 포(脯:찢어 말린고기)로 만들어 먹어버립니다. 그밖에도 주왕은 자신에게 간하는 신하 익후를 자(炙:불고기)로 만들어 먹어버립니다. 또 신하 귀후는 포로 매백은 해를 만들어 먹어버렸습니다.또 주왕은 신하인 황비호의 아내 경씨를 희롱하다 거절당하자 그녀를 해로 만들어 남편인 황비호에게 하사하고 먹게 합니다. 이에 황비호는 격노하여 군사를 일으켜 주왕을 제거하게 됩니다. 

동물세계에서나 통하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인간에도 적용되는 적나라한 사례입니다. 

 

 

 

 

 

 

# 식인의 시작 夏왕조시대 #

 

 

최초로 문헌에 기록된 식인풍습은 하나라때부터 시작합니다. 하왕조의 후예란 인물은 병사를 이끌고 약정국을 침공하여 국왕인 백봉의 궁전에 들어가 재산을 약탈하고 백봉을 살해한후 그 육신을 잘게 쪼개어 육장(肉醬)을 만들어 하나라 왕인 중강왕에게 바쳤습니다. 

즉 속국의 임금의 고기로 만든 육젓을 진미로 만들어 전리품으로 하왕에게 헌상한것입니다. 그 사건이 있고 얼마지나지 않아 후예는 그 신하인 봉몽과 자신의 애첩간의 공모에 의해 살해를 당합니다. 후예의 애첩은 과거 후예가 정복한 나라에서 전리품으로 데려온 왕녀였습니다. 

그녀는 후예를 살해한뒤 그를 역시 육장으로 만들었죠. 다음날 후예의 아들은 아버지를 찾았으나 찾지 못하자 의붓어머니에게 아버지의 행방을 묻자 후예의 육젓을 가져와 보여주며 "너의 아비가 우리나라를 멸망케하고 나의 아들을 죽여 육젓으로 담았으니 나도 너의 아비를 죽여 육젓으로 담았다. 너도 그의 아들이니 용서할수 없느나 니 아비의 육젓을 먹으면 용서해주겠다" 후예의 아들은 놀라 도망쳤으나 곧 잡혀 역시 육젓이 되었습니다. 


하왕조에서 처음으로 문서에 기록된 식인의 역사는 복수에 의한 것입니다만은 시간이 지날수록 복수 및 형벌로서의 식인에서 군량비 대신쓰는 식량으로써.. 단지 사람고기를 너무나 맛있어해서 즐기는쪽으로 발전하고 대상도 죄인, 원수에서 아무런상관이 없는 자국백성 및 부녀자로 확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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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를 옹호하려는 친지나(支那) 쥐대가리들+친지나(支那) 홍어+조선족들의 댓글에 올려 놨던 댓 글

 

 

1990년대 중반경까지 일본에서 야키니쿠(불고기) 하면  일본인들은 무슨고기로 인식하고 있었을까? 
물론 야키니쿠(불고기)는 제일교포들에 의해서 퍼진 한국요리인데  

한국에선 보통 불고기에 사용되어지는 고기라하면 일반적으로 소고기와 돼지고기 두 종류지만 
일본에선 오키나와 지역을 제외한 육지쪽에선 대체로 돼지고기로 만들어진 요리종류가 돈카츠등 몇가지 외엔 그다지 많지않고 잘 먹지 않는 편이다.  

그러다보니 1990년대 중반경까지는 일본인들에게 야키니쿠에 사용되는 고기는 누구랄것 없이 소고기 란 대답이 나왔고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다.(실제 1990년 대 초 일본인들에게 물어 보고 들은 사실) 

지금은 한국 관광와서 돼지고기맛을 알게 된 일본 관광객들에 의해 돼지고기를 찾는 일본인들도 많아진 편이다. 

고대 지나(支那:짱깨)의 해(醢)는 지나(支那:짱깨)인들에게 무슨 고기로 인식하고 있었을까~요??? 
그러고 공자놈께서는 해(醢)를 무슨 고기로 알고 즐겨 쳐 먹었을까~요?? 



他被处以最残酷的醢刑。 그가 가장 잔인한 해형에 처해졌다. 
醢时古代的一种酷刑。 해(醢)는 고대 형벌의 일종이다.

 

-흥부의 성-

국회  문죄앙 탄핵 청원 (효력없는 적와대 청원이 아닌 효력있는 국회청원임 : 10만 이상시 효력 발생)

☞ ☞ ☞   https://petitions.assembly.go.kr/status/onGoing/9EB32089E7B105CBE054A0369F40E84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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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コメン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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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known (macmaca)
2020-11-27 05:54:50
醢는 육장.젓갈로 형벌해와 다름. 소금.장.양념넣고 육류로만든 醢는 한국의경우에도 제사.결혼예물.김치에도 들어가는 문명의 산물.중국문물 수입,한국도 신라때부터 醢등장.삼국사기,고려사,세종실록지리지에도 나옴.황하문명,유교,하느님,조상신,공자나라 중국과 양념도 잘몰랐고 지금도 날것회가 주식인 일본.2차대전중 미군.중국인 인육먹어 재판받은 현대식인종 일본.하느님.창조신 이기려던 일본 불교Monkey.
http://blog.daum.net/macmaca/3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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