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ホウケイじゃないのにホウケイと呼ばれる!

지나(支那)의 식인풍습,1919년 러시아수도에서 인육장사,현재도 식인?

2020-02-09 18:35:40 | 식인종 지나(支那食人文化)

지나(支那)의 식인풍습,1919년 러시아수도에서 인육장사,현재도 식인?

 
 

 

대쥬신
2010. 3. 9. 2:42

 

원래 한족은 아시아의 노예잡족,

우리가 비웃어주며 멸시해도 괜찮은 하찮은 야만노예잡종족속!!!
 
식인문화는 지나(支那) 4천년 역사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한나라가 건국된 기원전 206년부터 청나라가 멸망한 1912년까지, 지나(支那)에서는 식인의 기록이 220차례나 정사(正史)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최초의 식인 이야기는 지나(支那)의 전설적인 왕조인 하나라 당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죠. 아들을 죽인 원수를 죽여 육장(肉醬)을 만들어 원수의 아들에게 먹기를 강요한 여인 이야기입니다. 유교는 '복수주의'를 인정할 뿐 아니라 오히려 장려한 면이 있어 복수에 의한 식인행위가 있었습니다. 

 
 
'부모의 원수와는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다(불구대천, 不俱戴天)'는 생각으로 심하면 부친의 원수를 29대까지 갚기도 했습니다. 복수할 때는 한 칼에 숨통을 끊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천 갈래, 만 갈래로 잘랐으며 때로는 고기를 잘라먹고 심장과 간을 꺼내어 씹어먹으며 뼈까지 갈아먹는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한 예로, 측천무후 당시 잔혹한 고문과 형벌로 유명했던 내준신이 처형되었을 때에는, 군중들(그에게 처형당한 이들의 가족들)이 다투어 그의 고기를 잘라 먹었다고 합니다. 황제는 법률로 '살육의 형'을 규정했습니다. 이는 주나라 때의 율령 체제부터 등장 하지만 이전에도 마찬가지였죠. 

식인 기록이 나타난 최초의 정사인 <사기(史記)>는 지나(支那) 최초의 역사왕조인 은 왕조(주나라 이전의 왕조)의 마지막 임금 주왕이 신하들을 '해(인체를 잘게 썰어 누룩과 소금에 절인 고기)', '포(脯, 저며서 말린 고기)', '자(炙, 구운 고기)'로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해, 포, 자'는 이후 지나(支那) 춘추전국 시대까지의 인육 조리법의 대표격으로 계속 등장합니다.
 

 

춘추시대 노나라 사람인 공자는 이 '해'를 즐겨서 해 없이는 식사를 안 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죠. 그러나 공자가 아끼던 제자 자로가 위나라의 신하로 있다가 왕위 다툼에 휘말려 살해되고, 그의 시체는 잘게 토막내어져 해로 만들어지고 말았습니다. 이 해는 사자에 의해 공자의 식탁에까지 전해집니다. 이 일 후로 공자는 그렇게 좋아하던 해를 먹지 않았습니다.

지나(支那) 역사사회에서는 생존경쟁의 패자가 승자의 먹이로 식탁에 오르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그리고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식인이 자행되기도 합니다.
춘 추전국시대의 유명한 제나라 환공은 미식가로도 유명했는데 그가 진미를 찾자 요리사인 역아(易牙)는 자기의 장남을 잡아서 삶아 바쳤습니다. 역아뿐 아니라 극한 상황에서는 자기 살을 베어내거나 아내나 자식을 잡아 주군을 대접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흔히 이런 경우는 충성으로 기려지기도 했습니다.

인육은 가끔 약용으로도 쓰였는데, 이시진의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인체 각 부위의 약효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통념에다 '효'라는 유교 사상의 실행으로서, 병으로 죽어가는 부모에게 자신의 넓적다리살 등을 잘라서 봉양하는 일은 더욱 흔했습니다. 단, 이런 일이 진정한 효행인가 하는 정치적인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당시의 황제 뜻에 따라 어떤 시대의 사람들은 '효자'로 표창을 받았고, 다른 시대 사람들은 신체를 훼손한 '불효자'로서 매를 맞은 후 귀양을 갔습니다.

수·당대에는 인육시장이 출현했고, 인육애호가가 열전(列傳)에 기록되기도 했습니다. 송 말기부터 원대에는 <철경록(輟耕錄)>이라 하여 인육 요리법을 자세히 적은 요리책까지 출판되었죠. 원나라를 방문한 마르코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자신이 목격한 복주(福州)의 식인 풍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지방에서 특별히 기록할 만한 것은 주민들이 그 어떤 불결한 것이라도 가리지 않고 먹는다는 사실이었다. 사람의 고기라도 병으로 죽은 것만 아니면 아무렇지 않게 먹는다. 횡사한 사람의 고기라면 무엇이건 즐겁고 맛있게 먹는다. 병사들은 잔인하기 짝이 없다. 
그 들은 머리 앞부분을 깎고 얼굴에 파란 표식을 하고 다니면서 창칼로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인 뒤, 제일 먼저 피를 빨아먹고 그 다음 인육을 먹는다. 이들은 틈만 나면 사람들을 죽여 그 피와 고기를 먹을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지나(支那)의 식인 풍습은 <삼국지>, <수호지>, <서유기> 등 유명한 지나(支那) 고대의 소설에도 잘 나 타나 있습니다. <삼국지>의 경우, 정사로 기록된 진수의 삼국지에는 유비가 즐겨먹은 음식이 인육으로 만든 포였다고 하 며, 여포가 죽은 후 그 고기를 죄인들에게 먹였다고 합니다. 소설 <수호지>에서는 인육으로 고기만두를 만들어 파는 악 한이 등장하고, <서유기>에서는 고승(高僧)의 고기가 불로장생의 영약이라 하여 삼장법사가 끊임없이 요괴들의 공격을 받 는 장면이 나옵니다.

인육의 판매를 금지하는 법이 송나라 때에 만들어졌지만, 명나라를 거쳐 청나라 말기에 이르기까지 인육은 시장에서 공공연히 매매되었습니다. 1918년, 지나(支那) 근대의 사상가 노신은 <광인일기(狂人日記)>에 식인의 피해망상증에 걸린 광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식인 풍습이 만연한 사회상을 폭로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또한 '국가는 사람이 사람을 먹는 역사사회'라고 정의한 바 있습니다. 지나(支那) 5·4운동의 사상적 지도자 오우(吳虞, 1874∼1949)는 '유교 = 식인'이라 하며 강력히 유교를 비판했습니다. 식인풍습은 공산화
된 지나(支那)에서 유교의 폐해 중 하나로 비판되었고, 최근에 이르러서야 점차 사라져갑니다.

오랜 역사와 문화를 자랑해 온, 유교문화의 종주국인 지나(支那)에서 식인 풍습이 꾸준히 이어져 내려왔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역사의 단 면입니다. 식인 풍습은 5천여 년간 합법적으로 존재했고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널리 행해졌습니다. 불과 얼마전 홍위병이 날뛰던 시기에도 지나(支那)전역에 광범위하게 식인풍습이 실존했으며 신용문객잔으로 대표되는 흑점이 존재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광인일기에 나타나는 주인공의 과대망상증은 노신이 정신병자를 묘사한것이 아니라 지나(支那)에서의 실제상황을 그대로 전하려했다는 점을 상 기하시면 이해가 쉬우시리라 생각 됩니다.(주인공은 주변 이웃이 자신을 살해하여 잡아먹으려한다는 피해망상증환자로 나옵니다) 
노신이 아큐근성과 식인풍습이 지나(支那)를 망치는 2대악으로 보고 이것을 근절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가를 보면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오랜기간의 식인풍습은 노신의 말대로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게 만들고 신의라는 것 자체를 없애 버렷습니다. 지나(支那)인들이 신의를 말할때면 그들이 가장 위기에 몰렸을 때입니다. 그때만 예나 도덕, 신의 등이 나옵니다.

식인풍습 즉 약육강식의 단순한 논리는 그들의 특징적인 속성, 즉 강자앞에선 토끼가 되고 약자 앞에선 무서운 맹수가 되어버리는 것을 잘 설명해 주는 근거가 아닐까요? 일단 전쟁, 기근으로 식인풍습이 대대적으로 시작되면 잡아먹히는 인간의 종류와 순서에 일정한 법칙이 있었습니다. 일단 유괴하기 쉬운 어린이를 시작으로 여행자, 독신자 및 독거노인 등으로 순서가 옮겨갑니다.

나중엔 비교적 소규모의 가족단위를 이루는, 즉 처치하기 쉬운 가정을 다음 차례가 되고 비슷한 규모의 가족단위간에는 관에 줄이 있어 파벌에 속한자가 속한 가정이 그렇지 못한 가정을 잡아먹고 맨 마지막 단계에 가면 부모가 자식을, 남편이 아내를, 형이 동생을 잡아먹었습니다. 

지나(支那) 특유의 대가족제도는 결국 식인풍습으로부터 자기자신과 가족을 지켜내려는 눈물겨운 제도이며 여러명이 뭉쳐서 숫적우위를 바탕으로 
잡아먹힐 확률을 낮추고 생존확률을 높이려는데 주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잡아먹히는 순서상 쪽수가 많은 가정이 맨 나중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세계 최고 문화민족의 식도락
  
위에서 식인문화에 대해 이미 지적한 두 가지 경우보다도 더욱 끔찍한 일은 과거 지나(支那)의 미식가(美食家)들이 식도락을 추구하기 위해 사람고기를 상육(想肉)이라고 하여 즐겨 먹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요즘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오해는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지나(支那)에서는 진귀한 것을 특미(特味)로 봅니다. 미식가들이 인육을 먹는 것에 대한 기록들이 만만치 않게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제나라의 환공의 이야기입니다. 환공은 유명한 미식가였는데 그가 맛있는 요리를 찾자 요리사였던 역아(易牙)는 환공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자신의 세 살짜리 아들을 죽여서 요리해 바칩니다. 역아는 이로써 환공에 대한 충성심을 보증 받아서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지요.
  
뭐니 뭐니 해도 지나(支那)의 식인문화는 당나라 때가 전성기였습니다. 당나라는 세계적인 대제국으로 정치적으로 안정된 나라였기 때문에 고급 귀족문화가 크게 발달하였지요. 그런데 생각해봅시다. 나라는 안정되고 귀족들은 엄청난 부귀영화를 누리다 보니 이것저것 맛있는 것만 골라 먹다가 싫증이 나면 더욱더 진귀한 것을 찾게 됩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인육이 요리의 재료로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당나라 때는 전국 각지에 미식가들을 위한 상육(인육)을 판매하는 시장이 있었다고 합니다. 슬픈 얘기지만 인육은 쌀값보다 싸고 개고기의 1/5 정도였다고 합니다.
  
당나라 이전에는 인육이 암시장에서 남모르게 거래되었다가 당나라 이후에는 아예 인육시장이 개설되어 인육이 공개적으로 거래되었다고 합니다. 9세기 당나라 말기에 지나(支那)를 방문했던 페르시아 상인들에 의해 인육이 시장에서 공개적으로 판매되는 것이 목격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당나라 측천무후 때는 식인 문화의 극성기로 인육은 두 발 달린 양고기라 불렸으며 인육이 너무 많이 유통되어 다른 고기의 값이 폭락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원나라 때 도종의의 ‘철경록(輟耕錄)’에 친구를 젓갈로 만들어 먹거나 자기의 첩을 삶아 먹기도 하는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여러분들은 아마 “에이, 세계에서 대표적인 문화민족인 한족(漢族)들이 무슨 그런 짓을 … ” 하시겠지만 그게 아닙니다. 아예 인육을 파는 상설 시장까지 있었다는 것이지요. 구체적으로는 당나라 때의 양주(楊州)와 봉상(鳳翔), 송나라 때는 항주(杭州)와 변경(汴京), 명나라 때에는 개봉(開封)과 중경(重京), 청나라 때에는 안경(安京) 등에는 상설 인육시장이 개설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많은 지나(支那)의 서적들과 지나(支那)에 대한 찬미자 마티니(Martin Martini : 1614~1661) 등의 외국인들의 견문록에도 무수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자신이 직접 목격한 복주(福州)의 식인 풍습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더욱 끔찍한 것은 원나라의 도종의가 지은 ‘철경록(輟耕錄)’이나 송나라 장작이 지은 ‘계륵편’에는 사람고기를 요리하는 방법에 상세히 나와 있다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지나(支那)의 대표적인 의학 서적인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인체 각 부위의 약효에 대하여 상세히 기록하고 있지요. 12세기에는 한 사람당 15근 정도의 인육을 얻었다고 합니다.
  
  명나라 때 사천(四川) 지방에 인육이 남자일 경우에는 한 근에 7전, 여자는 8전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가격은 다른 고기들과 비교했을 때 형편없었다는 것이죠.
  
   이 모든 일들은 수천 또는 수백 년 전 과거의 일이니 이젠 이 같은 이야기로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없겠다고 생각하시겠지만, 불과 1백 수십여 년 전 증국번의 일기에 의하면 1860년 강소지방의 상육은 한 근에 90전이었는데 태평천국의 난 때 인플레가 심해서 130전까지 폭등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1900년대 초 군벌시대에는 상육이 90전이었다고 합니다.
  
  청나라 말기에는 말레이계 사람의 인육을 수입하여 대나무 바구니에 담아서 공개적으로 판매하였고, 한족들은 이것을 보약(補藥)으로 먹었다고 합니다. 지나(支那)의 대표적인 근대 문학가인 노신(魯迅)은 ‘광인일기(1918)’에서 식인의 피해망상증에 걸린 광인(狂人 : mad man)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지나(支那)사회가 가진 구조적 병폐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작품에 나타나는 식인 풍습은 하나의 상징이나 비유로 봐야겠지만, 단순한 상징이나 비유라기보다는 실제 상황을 기반으로 묘사한 점이 눈에 띱니다. 그리고 이런 식인문화는 먼 과거의 얘기가 아닙니다. 1919년 식량 부족이 심했던 러시아의 수도에서 지나(支那)인들이 인육 장사를 하다가 총살되기도 했지요. 정말 현재 지나(支那)에 식인 문화가 사라졌는지 공연히 의심스럽기도 합니다.
  
   조금은 극단적인 말이지만 지나(支那)의 식인 문화는 4천년 동안 지속되고 있으며 어쩌면 이 식인문화를 알지 못하고서 지나(支那)의 역사와 문화를 말하기도 어려운 일인지도 모릅니다. 한나라가 건국된 기원전 206년부터 청나라가 멸망한 1912년까지, 지나(支那)에서는 식인의 기록이 200차례 이상이나 정사(正史)에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1960 년대나 70년대까지도 암암리에 지나(支那) 전역에 식인풍습이 남아있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극단적인 말이겠지만 찬란한 중화 문명의 확산과 식인 문화는 거의 동시에 일어난 것은 아닐까요? 초기의 황하유역에서 장강을 거쳐 남지나(支那)로 확산되어 왔으니까요. 물론 이것은 인구의 증가에 따르는 식량 부족이 원인이겠지요. 그렇지만 세계 최고의 문화민족임을 자부하는 한족(漢族)의 식인 문화는 이해하기 어렵군요.

 

 

사족이 지만 음식에 대한 지나(支那)인들이 과도한 집착은 전 세계적으로 사스(SARS) 공포를 낳았습니다. 사스는 2003년 발생한 대표적인 괴질(怪疾)로 치료약이 아직도 발견되지 않아 전 세계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스는 지나(支那)의 독특한 음식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연구가 나오고 있지요. 즉 지나(支那) 언론의 대체적인 시각은 광동지역을 주변으로 사람들이 “네 발 가진 것 중에선 책상, 날아다니는 것 중에선 비행기, 물 속에선 잠수함 빼고 다 먹는다”는 식으로 야생동물을 남획해 먹다가 사스란 괴질을 불러들이고 말았다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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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를 옹호하려는 친지나(支那) 쥐대가리들+친지나(支那) 홍어+조선족들의 댓글에 올려 놨던 댓 글

 

 

1990년대 중반경까지 일본에서 야키니쿠(불고기) 하면  일본인들은 무슨고기로 인식하고 있었을까? 
물론 야키니쿠(불고기)는 제일교포들에 의해서 퍼진 한국요리인데  

한국에선 보통 불고기에 사용되어지는 고기라하면 일반적으로 소고기와 돼지고기 두 종류지만 
일본에선 오키나와 지역을 제외한 육지쪽에선 대체로 돼지고기로 만들어진 요리종류가 돈카츠등 몇가지 외엔 그다지 많지않고 잘 먹지 않는 편이다.  

그러다보니 1990년대 중반경까지는 일본인들에게 야키니쿠에 사용되는 고기는 누구랄것 없이 소고기 란 대답이 나왔고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다.(실제 1990년 대 초 일본인들에게 물어 보고 들은 사실) 

지금은 한국 관광와서 돼지고기맛을 알게 된 일본 관광객들에 의해 돼지고기를를 찾는 일본인들도 많아진 편이다. 

고대 지나(支那:짱깨)의 해(醢)는 지나(支那:짱깨)인들에게 무슨 고기로 인식하고 있었을까~요??? 
그러고 공자놈께서는 해(醢)를 무슨 고기로 알고 즐겨 쳐 먹었을까~요?? 



他被处以最残酷的醢刑。 그가 가장 잔인한 해형에 처해졌다. 
醢时古代的一种酷刑。 해(醢)는 고대 형벌의 일종이다.

 

-흥부의 성-

 

 
지나(支那) 바이러스 공화국
Virus republic of china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은 말!

세계의 민폐종족! 홍어와 지나(支那:)는

몰살이 답이다

 


살아있는 새끼쥐도 산채로 먹는 지나(支那).jpg(혐오주의)

2020-02-08 22:27:11 | 식인종 지나(支那食人文化)

 


우한 폐렴의 발원지는 우한 바이러스 연구소!


 

 

 

 

 

클릭! 영상 새끼쥐 먹방 1

 

 

 

 

 
클릭! 영상 새끼쥐 먹방 2
 
 

갓 태어난 새끼쥐를 산채로 간장에 찍어먹는

지나(支那)요리 산쯔얼

세 번 우는 음식이라 해서 삼교채라고도 불리는데

새끼 쥐를 젓가락으로 잡을 때 (찍)

새끼 쥐를 간장에 찍을 때 (찍)

마지막으로 입안에 넣고 씹을 때 (찍)

이렇게 세번 운다해서 붙여진 이름


산쯔얼에도 등급이 있는데

갓 태어나 눈도 못뜨고 내장도 훤히 비치며

똥도 생기지 않은 새끼 쥐를 고급으로 쳐서 비싸

게 팔리고

조금 자라 똥이 생긴 쥐는 저가에 팔리는데

똥도 안생긴 고급 새끼쥐는 무척 귀해서

과거에는 귀족이나 왕족들만 먹을 수 있었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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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id="id_div_main" class="class_div_main image"></figure>
지나(支那) 후베이성 우한시에서 퍼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이른바 ‘우한 폐렴’이 지나(支那)를 비롯해 전세계로 확산하고 있는 가운데, 박쥐에서 바이러스가 유래했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는 지난해 12월 발생한 지나(支那) ‘우한 폐렴’의 원인 바이러스로, 인체 감염 7개 코로나바이러스 중 하나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우한 폐렴의 원인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로 확인됐다”며 “우한 폐렴이 인간 대 인간으로 전염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고 발표했다.

<figure id="id_div_main" class="class_div_main image"></figure>
지나(支那)과학원 상하이 파스퇴르연구소와 군사의학연구원 연구자들이 지난 21일 학술지 ‘지나(支那)과학: 생명과학’에 발표한 논문에서 “우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자연 숙주는 박쥐일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이들 연구자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와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바이러스가 큰박쥐(과일박쥐)에서 발견되는 ‘HKU9-1’ 바이러스를 공통 조상으로 가진 것으로 보인다”면서 “박쥐와 인간 사이에 미지의 중간숙주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지나(支那)질병예방통제센터의 가오푸 주임도 지난 22일 기자회견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우한의 화난 수산시장에서 팔린 야생동물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figure id="id_div_main" class="class_div_main image"></figure>
우한 폐렴의 진원지로 알려진 이 시장에서는 뱀과 토끼 그리고 꿩 등 각종 야생동물을 도살해 판매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가운데 지나(支那)판 트위터 ‘웨이보’ 등에서는 박쥐 음식을 먹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영상이 공유돼 논란이다.

한 젊은 여성이 지나(支那)의 고급 레스토랑으로 보이는 곳에서 박쥐 요리를 먹는 모습이 영상에 담겼다. 일행으로 보이는 한 남성은 여성에게 “껍질을 먹지 말고 고기를 먹어라”라고 강요한다.

<figure id="id_div_main" class="class_div_main image"></figure>
냄비에서 나온 박쥐를 손에 든 여성은 거리낌 없이 먹기 시작했다. 첸치우시라는 유명 블로거도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박쥐가 요리된 모습을 영상으로 게재했다. 푹 익은 박쥐가 국물과 함께 그릇에 통째로 담겨 있다.

첸치우시는 “이번 일(우한 폐렴)을 겪은 뒤 지나(支那)인들은 야생동물을 먹는 행위를 포기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함께 남기기도 했다.

한편 지나(支那) 국가위생건강위원회 발표와 인민일보 보도에 따르면 현재까지 우한 폐렴으로 인한 사망자는 26명, 확진자 수는 860명이 넘었다. 국내 확진자는 2명이다.

소봄이 온라인 뉴스 기자 sby@segye.com
사진=사회관계망서비스(SNS) 갈무리


바퀴벌레와 같은 번식력의 종족!
지나(支那)
Virus republic of china





지나(支那) 식인 문화의 역사(支那 食人文化 歷史)

2020-02-04 22:40:05 | 식인종 지나(支那食人文化)

 

역사적 기록에 나타난 지나(支那)의 식인 문화

 

 

● 식인의 기록은 지나(支那)의 정사(正史)에서만 총 220회 등장하고 있다. 
 
 

최초의 식인 이야기는 지나(支那) 전설의 왕조 하나라 때 
아들을 죽인 원수를 육장(肉醬)으로 만들어 원수의 아들에게 먹기를 강요한 여인의 이야기다.

 
 
● 사마천의 사기에 최초로 기록된 식인사례는 상나라의 주(紂)왕의 이야기로...
 

 

"그는 대신인 구후의 딸이 절세미인이란 말을 듣고 아내로 삼았는데 
그 아내가 너무 정숙해 자신의 성적인 취향에 맞지 않자 격노해 그녀를 살해하고 
그녀의 아버지 구후를 해(인육을 소금에 절인 육젓)로 만들어 먹어버렸다. 
신하인 곽후가 이를 강력히 말리자 주왕은 곽후 또한 포(脯:찢어 말린고기)로 만들어 먹어버렸다."

 

 

그 외에도 주왕은 자신에게 간하는 신하 익후를 자(炙:불고기)로 만들어 먹어버리는가 하면 
신하인 황비호의 아내 경씨를 희롱하다 거절 당하자 
그녀를 해로 만들어 남편인 황비호에게 하사하고 먹게 하는 끔찍한 짓까지 저지른다. 
(후에 황비호는 격노해 군사를 일으켜 주왕을 제거하게 된다)

 

 

● 춘추시대 노나라 사람인 공자의 경우, 평소 ‘해’를 무척이나 즐겨 
이것 없이는 식사를 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예기, 동주열국지, 논어 등에서 언급된 내용) 
 

공자

 

그러나 그의 수제자 자로가 위나라의 신하로 있다가 왕위다툼에 휘말려 살해된 후 
그 시체가 잘게 토막나 해로 만들어져 공자 자신의 밥상에 올라온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아 
이후 그는 그렇게 좋아하던 해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 한고조 유방은 팽월을 죽인 후 간장에 절여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토사구팽의 사자성어는 유방이 팽월을 죽인 사건을 두고 붙여진 것이다.
 
 
 
● 수 양제는 자신에게 거역하는 신하를 삶은 뒤 그 국을 문무백관에게 내려 마시게 했다.
 
 
● 당나라 측천무후 집권시기에 탐관오리였던 내준신이 식인형을 당했는데 
 
 

군중들(내준신에게 처형당한 이들의 가족들)이 다투어 내준신의 고기를 산채로 잘라 먹어은 통에

시체는 눈 깜짝할 사이에 동이 났다. 
눈알을 도려내고 안면의 가죽을 벗겼으며 배를 찢고 심장을 끌어내니 
마침내 진흙 같은 찌꺼기만 남게됐다. (자치통감의 기록)

 
● 명대의 명장 원숭환 장군은 청나라의 계략으로 처형당했는데 
 

 

군중들이 몰려 와 그의 살점을 발라가는 바람에 
뒤늦게 시신을 수습하러 온 이들은 뼈밖에 수거할 수 없었다.

 
● 당나라 시대 이후로 식인풍습은 더 이상 이야깃거리도 되지 못할 만큼 흔한 일이 되어버렸다. 
 

 

지나(支那)인들 사이에서 널리 읽힌 대중적인 소설들 (삼국지, 수호지, 서유기 등)은 
그들 특유의 식인풍습을 상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 삼국지연의에서는 싸움에 지고 도망가는 유비에게 
자신의 아내를 죽여 그 엉덩이살로 음식을 만들어 바쳤다는 사냥꾼의 얘기가 있고
 

삼국지연의

 

진수의 정사 삼국지에서는 유비가 즐겨먹은 음식이 인육으로 만든 포였다는 기록이 있다.

여포가 잡혀 죽은 후 그 고기를 죄인들이 먹었다는 얘기 등이 나온다.

 
● 수호지에서는 지나(支那)의 일상적인 식인풍습을 아주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숨어 있다가 부자가 지나가면 뛰쳐나와 금품을 빼앗고 그 살은 고기로 먹고 기름은 등불을 밝히는 데 쓴다. 

뚱뚱한 자는 쇠고기 대용으로, 마른 자는 만두소로 만든다.
 

수호지

 

이것은 양산박 법도를 설명하는 부분에 나오는 것으로, 
소위 의적이라는 양산박 무리들은 사실은 사람을 죽여 재물을 빼앗고 그 고기를 먹는 극악무도한 악인들이었던 것이다. 

 

 

주인공 송강의 아우인 ‘흑선풍’ 이규는 사람을 죽이고 난 후 그 인육을 먹곤 했는데 
너무 많이 인육을 먹어서인지 눈알이 항상 붉게 충혈되었다고 한다. 
 

 

무송이 유배가는 과정에서는 지나가는 여행객들을 죽여 그 고기로 만두를 만들어 파는 끔찍한 주점이 나온다. 

 
 
● 지나(支那) 고사에 나오는 일화 中
 
나이든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며느리가 살았는데, 
때마침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다른 사람들을 잡아먹곤 했다. 
며느리는 시부모가 자신을 잡아먹을 거라는 말을 듣고, 놀라 친정으로 도망을 친다. 
친정 아버지는 "누구 딸을 마음대로 잡아먹어!" 라고 분개했지만 
후에 그 딸을 잡아먹은 건 친정 아버지였다.
 
 
 

● 지나(支那) 오호십육국시대 '후조'의 태자 '석수'는 날래고 용감했지만, 남의 아내를 겁탈하는 음란하고 잔인한 자였다.

 
 

석수에게는 독특한 취미가 있었는데,

미녀를 골라 예쁘게 단장을 시키고는 목을 자르고, 피를 잘 닦아서
소반에 담아 자신의 손님들과 감상하는 것이었다고...
그리고 미녀의 몸은 삶아서 손님들과 함께 먹었다.

 
 
● 과거 지나(支那)의 미식가들은 식도락을 추구하기 위해 사람고기를 상육(想肉)이라고 해 즐겨 먹었다. 
 
 

원나라의 도종의가 지은 ‘철경록(輟耕錄)’, 송나라 장작이 지은 ‘계륵편’에는 

사람고기를 요리하는 방법이 상세히 나와 있기까지 하다.

 
 
● 후대로 갈수록 맛으로 인육을 먹는 습관은 대다수 민중들에게까지 널리 퍼져 

인육을 장에서 공공연히 사고 팔며 아무 거리낌 없이 그 맛을 즐기게 되었다. 
‘신용문객잔’으로 대표되는 흑점(인육을 파는 주점)이 존재했던 것이 사실인 것이다.

 
 
 
● 지나(支那) 식인풍습의 절정은 당나라 시기로, 
당시 당나라는 고급 귀족문화가 크게 발달했으며 끊임없는 귀족들의 특미(特味)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본격적으로 인육을 요리재료로 쓰기 시작했다. 

 

 

당나라

 

이 때의 인육애호가가 열전(列傳)에 기록되기도 했는데, 
친구를 젓갈로 만들어 먹은 설진, 자기의 첩을 삶아 먹은 고찬의 이야기들이 나온다.
병중에 자기 노비의 고기를 먹은 독고장 등이 나오는데 모두 이 무렵의 인물들이었다.

 

 

● 당나라 시기 이전에는 인육이 암시장에서 몰래 유통됐지만 

당대에 이르러 전국 각지에 상육(인육)을 판매하는 시장이 생겨 공개적으로 거래를 하게 되었다. 

양주(楊州)와 봉상(鳳翔)은 당나라의 대표적인 상설 인육시장이 있던 곳.

 

상설 인육시장

 

인육은 납치, 인신매매 등으로 공급이 되었으며 또 중죄수들을 인육으로 만들곤 했는데, 
억울하게 인육이 된 사람이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 

 

 

여자의 경우 외모가 아름다우면 기방 등으로 팔려가지만, 

얼굴이 변변치 못하고 일을 할 만큼 튼실하지도 못하면 인육이 되곤 했다. 
 

측천무후 때는 식인 문화의 극성기로 
보통 인육은 두 발 달린 양고기라 불렸으며 
인육이 너무 많이 유통되어 다른 고기값을 폭락시킬 정도였다. (쌀값보다 싸고 개고기의 1/5 정도)

 

 

● 황소의 난때는 인육을 가공하는 기계를 끌고 다녔고, 

절도사의 군대는 마을을 종종 습격해 닥치는 대로 잡아먹어
절도사의 군대가 휩쓴곳은 사람이며, 짐승이며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 상설 인육시장은 이후에도 꾸준히 명맥을 이어 

송나라 때의 항주(杭州), 명나라 때의 개봉(開封)과 중경(重京), 청나라 때의 안경(安京) 등에 개설되었다. 

 

● 청나라 말기에는 말레이계 사람의 인육을 수입하여 대나무 바구니에 담아서 판매하였고, 
한족들은 이것을 보약(補藥)으로 먹었다고 한다. 

 

 

 

● 인육판매에 대해 형식적이나마 송나라때 금지법이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실효를 거두지는 못했다. 

 

● 심지어 외국에서도 지나(支那)인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는 인육이 판매되곤 했는데 

1919년에는 식량 부족이 심했던 러시아에서 지나(支那)인들이 인육 장사를 하다가 총살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 인육은 어느 시대에나 싼 고기로 취급되었는데, 
명나라 때 사천(四川)지방에서는 인육이 남자일 경우 한 근에 7전, 여자는 8전에 거래되었다. 
그러나 이 가격은 다른 고기들과 비교했을 때 형편없는 것이었다. 
 
1백여 년 전 청나라 때의 정치가 증국번의 일기에는 
1860년 강소지방의 상육은 한 근에 90전이었는데 
태평천국의 난 때 인플레가 심해서 130전까지 가격이 폭등하기도 했으며 
1900년대 초 군벌시대에는 상육이 90전에 거래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 지나(支那)를 방문한 외국인들은 지나(支那)의 식인풍습을 목격하고 기록으로 남기곤 했는데 

지나(支那)문명의 찬미자로 불리는 마티니(1614~1661)의 견문록에도 목격담이 나온다. 
마르코 폴로 또한 ‘동방견문록’ 에서 자신이 직접 목격한 복주(福州)의 식인 풍습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마르코 폴로

 

이 지방에서 특별히 기록할 만한 것은 주민들이 그 어떤 불결한 것이라도 가리지 않고 먹는다는 사실이었다. 
사람의 고기라도 병으로 죽은 것만 아니면 아무렇지 않게 먹는다. 
횡사한 사람의 고기라면 무엇이건 즐겁고 맛있게 먹는다. 
병사들은 잔인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머리 앞부분을 깎고 얼굴에 파란 표식을 하고 다니면서 창칼로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인 뒤, 
제일 먼저 피를 빨아먹고 그 다음 인육을 먹는다. 
이들은 틈만 나면 사람들을 죽여 그 피와 고기를 먹을 기회를 엿보고 있다

 

 

 근대 문학가 노신은 그의 또 다른 작품인 ‘아Q정전’ 에서 

노예근성과 함께 식인 풍습을 '지나(支那)의 2대악'으로 규정했다.

 

식인 풍습

 

당시 지나(支那)의 식인풍습 문제가 얼마나 심각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 지나(支那) 5·4운동의 사상적 지도자 오우(吳虞)는 직설적으로 
‘유교의 사상이 식인풍습의 기반을 이루었다’고 주장하며 강력히 유교를 비판했으며 
이후 지나(支那)공산당에서도 유교의 폐해 중 하나가 식인풍습을 조장한 것임을 밝혔다.
 

오우(吳虞)

 

충효, 인의를 강조한다는 유교는 ‘복수주의’를 인정할 뿐 아니라 오히려 장려를 했다. 
‘부모의 원수와는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다(不俱戴天)’ 는 생각으로 
심하면 부친의 원수를 29대까지 갚기도 했는데 그것을 효라고 본 것이다. 

 

 

● 부모의 복수를 하는 자는 지원극통함을 푼다는 의미로 
한 칼에 원수의 숨통을 끊지 않고 수천갈래로 난도질을 한 후 그 고기를 먹거나 심장과 간을 꺼내어 씹기까지 했다.

 

‘효’라는 유교 사상의 실행으로서 
병으로 죽어가는 부모에게 자신의 넓적다리살 등을 잘라서 봉양하는 일이 흔했다. 

 

● ‘충’을 보이기 위한 식인이 자행되기도 했는데, 
실례로 춘추전국시대의 유명한 제나라 환공의 일화가 있다. 

 

충

 

환공은 유명한 미식가였는데 그가 진미를 찾자 

요리사였던 역아(易牙)는 환공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자신의 세 살짜리 아들을 죽여서 요리해 바침으로 환공에 대한 충성심을 보증 받는다. 
(역아는 후일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는 간신이 된다) 

 

역아(易牙)

 

역아뿐 아니라 극한 상황에서 자기 살을 베어내거나 아내, 자식을 잡아 자신의 주군에게 대접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흔히 이런 행위는 충으로 기려졌다.

 

● 인육은 약용으로도 쓰였다. 
이시진의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인육의 각 부위에 대한 약효까지 설명하고 있다

 

본초강목(本草綱目)

 

(동양대 김운회 교수의 글 + 잡다한 정보 몇개 끄집어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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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를 옹호하려는 친지나(支那) 쥐대가리들+친지나(支那) 홍어+조선족들의 댓글에 올려 놨던 댓 글

 

 

1990년대 중반경까지 일본에서 야키니쿠(불고기) 하면  일본인들은 무슨고기로 인식하고 있었을까? 
물론 야키니쿠(불고기)는 제일교포들에 의해서 퍼진 한국요리인데  

한국에선 보통 불고기에 사용되어지는 고기라하면 일반적으로 소고기와 돼지고기 두 종류지만 
일본에선 오키나와 지역을 제외한 육지쪽에선 대체로 돼지고기로 만들어진 요리종류가 돈카츠등 몇가지 외엔 그다지 많지않고 잘 먹지 않는 편이다.  

그러다보니 1990년대 중반경까지는 일본인들에게 야키니쿠에 사용되는 고기는 누구랄것 없이 소고기 란 대답이 나왔고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다.(실제 1990년 대 초 일본인들에게 물어 보고 들은 사실) 

지금은 한국 관광와서 돼지고기맛을 알게 된 일본 관광객들에 의해 돼지고기를를 찾는 일본인들도 많아진 편이다. 

고대 지나(支那:짱깨)의 해(醢)는 지나(支那:짱깨)인들에게 무슨 고기로 인식하고 있었을까~요??? 
그러고 공자놈께서는 해(醢)를 무슨 고기로 알고 즐겨 쳐 먹었을까~요?? 



他被处以最残酷的醢刑。 그가 가장 잔인한 해형에 처해졌다. 
醢时古代的一种酷刑。 해(醢)는 고대 형벌의 일종이다.

 

-흥부의 성-

지나(支那) 바이러스 공화국

Virus republic of china


지나(支那)의 식인문화 (정말 공자님은 인육을 쳐 드셨던 걸까요?)

2020-01-27 10:01:57 | 식인종 지나(支那食人文化)

 

지나(支那)의 식인문화 (정말 공자님은 인육을 드셨던 걸까요?)

 

강태희

2003.12.20 23:29:17 (*.181.103.201)

 

 

 

<< 눈 덮인 들길 걸어갈 제 행여 그 걸음 아무렇게나 하지 말세라, 오늘 남긴 내 발자국이 마침내 뒷사람의 길이 되리니...(書 - 백범 김구, 作 - 서산대사) >>

아래의 있는 글은 다음카페에 올라와 있던 글입니다. 
정말 공자님은 인육을 드셨던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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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나(支那)의 식인문화 >>
 
대만의 사학자 황문웅은 지나(支那)의 식인문화는 5천년을 관통하며 지속되고 있고 식인문화를 알지 못하고서 지나(支那)의 역사와 문화를 논한다는것은 있을수 없는일이며 지나(支那)인의 보편적인 사고방식도 이해할수 없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왜 지나(支那)인은 서로를 믿지 못하고 부모자식간에서 배신을 하는가? 왜 지나(支那)인은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게 잔인한가? 왜 지나(支那)는 지나(支那)특유의 대가족주의가 발달했는가 등등.. 이모든것이 식인문화와 관련이깊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식인문화로 인한 폐해와 지나(支那)인들의 사고에 미친 악영향을 노신은 광인일기를 써서 정면으로 비판했죠. 

 
 
지나(支那)사람이 아닌 외국인이 지나(支那)의 식인문화에 대해 심도 있게 연구를 한 사람들은 바로 일본인들입니다. 그들은 이 식인문화 연구를 통해 지나(支那)인의 특성을 잘 간파하고 있었고 이를 대지나(支那) 전략을 짜는데 기본지식으로 활용했습니다. 우리는 바로 옆나라에 살면서도 지나(支那)의 식인문화가 존재했는지 조차도 모르고 그것이 지나(支那)사람들의 사고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게 한국인과 일본인들의 차이가 아닐까요? 여기 계신 분들이 허락하신다면 제가 알고 있는 지나(支那)의 식인문화를 연재형식으로 차례대로 올릴까 하는데 허락해주시면 하루나 이틀에 한개정도 제가 시간이 날때마다 정리해서 올리고자 합니다. 
 
 

 

 

지나(支那)의 식인문화는 미개종족의 식인문화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확실히 지나(支那)의 식인문화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의 역사와 정치,문화 지나(支那)인의 사고방식에 미친 영향은 엄청납니다. 왜 지나(支那)인들이 서로를 믿지 못하며 부모자식간에도 안믿는지.. 식인문화를 살펴보면 이해가 가실것입니다. 또 입으로는 예를 외치면서도 같은 입으로 사람을 잡아먹는 그들의 심리상태토 이해가 가실겁니다. 연재해도 좋다는 리플이 있으면 연재를 시작할까 합니다. 그럼 건강하십시요. 

 

 

식인종으로 알려진 마사이족 여자들이 뇌가 석회화되어 죽는 경우가 많다는 것으로 세계보건기구에 보고되었다. 그 원인을 찾기 위해 역학팀을 보내 연구했더니 그들의 식인풍습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사람고기는 제일 좋은 부분부터 남자, 노인, 어린이 차지가 되고 가장 먹기 어려운 골수나 뇌부분을 여자들이 먹기 때문이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 식인문화가 생겨난 배경

 
 
 

1.격한쟁투에 따른 가혹한 형벌제도의 탄생 

 
지나(支那)의 역대 황제들은 율령에 의해서 성문법을 규정했습니다. 중원을 둘러싼 격렬한 쟁투는 잔혹한 보복을 낳았고 잔혹한 형벌제도를 탄생시켰습니다. 이 잔혹한 형벌들은 지나(支那)의 식인문화를 정당화시키는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전세계에 유래가없는 황제의 명령에 의한 인간1의 고기를 먹거나 먹이게 하는 "식육의 형벌" 이 그것이며 그 잔혹한 형벌은 놀랍게도 성문법으로 규정되어 버렸습니다. 
 
 

 

예를 들어 주나라시대에는 중죄인에게 5가지 형벌을 내리는데 묵형, 비형, 궁형, 월형, 살형이 성문법으로 규정되었습니다. 묵형은 이마에 먹으로 죄인의 문신을 새기는것이고 궁형은 거세를 시키는 형이며 월형은 다리를 자르는형입니다. 사상가인 묵자는 묵형을 받았고 사마천은 궁형을 그리고 병법의 대가인 손자는 월형을 받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그 형벌은 더 잔혹해지고 가짓수도 대폭적으로 늘어나 나중에는 여자의 생식기를 틀어막아 버리는 형벌까지도 생겨나게 됩니다. 그리고 드디어 식육의 형벌이 성문법으로 기록되어 실시되게 되며 이는 전 중국인의 식인풍습을 확산시키는데 기폭제 역활을 하게 됩니다. 

 
 
 

 

2.지나(支那)의 역사는 살인의 역사 

 
지나(支那)의 역사상 대규모적인 내란은 진시황제 이후 1920년까지 160차례이고 소비된 기간은 896년입니다. 즉 3년에 1년은 내란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봉건영주간의 침탈전쟁은 448차례에 이르고 대규모 전쟁은 222차례입니다. 소비된 기간은 이루 말할수 없을정도지요. 
 
 

 

근대에 이르면 이러한 양상은 더욱 격해집니다. 중화민국 정권수립이후 22년 동안 7백회의 내전이 발생했고 그중 사천성에서만 5백회이상이 발생했습니다. 이를 두고 모택동은 지나(支那)를 방문한 알바니아 군사대표단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나(支那)인을 가르켜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 했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우리는 투쟁과 전쟁을 사랑하는 민족이다." 

 
 

양계초라는 인물은 지나(支那)인을 육민(戮民)이라 칭했는데 이는 전란에 의한 살육사의 비율이 굉장히 높은 국민이란 뜻입니다. 내란과 기근이 덮칠때마다 소,돼지처럼 죽어가는것이 역사의 숙명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은 1989년 천안문 사태에서 또다시 한번 증명됩니다. 

 

 

 

 

3.역사상 유래를 찾을수 없는 천재지변과 기근 

 
등운특이란 사람이 지은 지나(支那) 구황사란 통계에 의하면 지나(支那)는 기원전 18년 부터 1937년 까지 수해, 한발, 메뚜기창궐, 우박, 태풍, 지진, 대설등의 전채만 5천 2백여차례가 있었다고 발표했습니다. 즉 평균 6개월마다 1차례의 재해가 일어났음을 의미합니다. 

가혹한 형벌체계의 발전과 성문법화, 그리고 전란의 역사, 그리고 기근의 역사, 대개 심한 기근이 들었을때 전란이 발생하는점을 두고보면 그때의 식량사정이 어떠했을런지는 어렵지않게 짐작이 가시리라 생각되어 집니다. 

지나(支那) 정사 중 사기(史記)를 비롯한 이십육사등에 기록한 전란, 기근, 형벌로 인한 식인풍습은 220여차례가 기록되고있고 자치통감, 속자치통감, 명통감, 문헌통고, 속문헌통고, 등등의 자료에 기록된 식인풍습까지 계산하면 거의 셀수가 없을정도의 식인사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나(支那)의 식인문화(3) 유교와 지나(支那)인의 식인의 관계 

 
지나(支那)인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들의 역사를 알아야하고 그것이 그들 사고와 가치 및 문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직접 그들과 부딪히며 배워나가야 하겠죠. 

식인문화는 지나(支那)의 고유문화이며 이를 잘 이해하면 지나(支那)인의 사고방식과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되어서 입니다. 이 연재글이 불쾌하시다면 연재를 중단할 계획입니다만.. 중단하라는 리플이 없는한 계속할 작정입니다. 

먼저 식인문화에 대한 전반을 살펴보고 그것이 지나(支那)인의 가족주의, 대인관계, 중화사상, 기업문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나름대로 분석하고 그것을 연재하려 합니다. 

지나(支那)의 식인문화가 발달하게 된 배경에는 중원을 둘러싼 격한 쟁투에 따른 잔혹한 형벌제도의 탄생과 사람을 잡아먹는 형벌이 성문법으로 제정되어 법적으로 허용되었다는점과 세계에서 유래를 찾을수없는 잦은기근과 천재지변, 전쟁, 농업기술낙후로 인한 식량부족등이 한대 맞물리면서 확산되었다는것입니다. 

법적으로 식인이 허용되고 식량부족에 기근, 전란이 잦아들면서 차츰 식인문화는 아무 저항감 없이 지나(支那)민중에게 뿌리 박히게 되었던것 같습니다. 따라서 정쟁, 전쟁에서 패배한 정적, 적국군병 및 국민등은 "잡아 먹히는 인육"이 되는것은 너무도 당연했고 상황에 따라선 자국국민을 임의로 대량 징발해서 하루에 수천명씩 군대의 식량으로 사용되어진것도 지나(支那)역사를 살펴보면 결코 보기 드문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와 인의를 강조하는 유교도 이에 한몫을 단단히 했습니다. 

왜냐면.. 공자역시 정당한 복수를 칭송하였기 때문입니다. 지나(支那)에서 왜 유교가 발달할수 밖에 없었던 이유도 식인문화와 관련깊습니다. 춘추전국시대에 떠도는 말중에 하나가 "만일 사람을 잡아먹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사람이 바로 성인(聖人)이다" 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말은 그만큼 식인문화가 널리퍼져 있었고 모든 지나(支那)인이 사람을 "즐겨" 먹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회분위기가 그런 상태였기 때문에 "예"와 "도덕"이 강조되어질수 밖에 없었고 그런 사회분위기 하에서 유교가 발달 했습니다. 
 
 

 

 

 

지나(支那)의 식인문화(4)지나(支那) 식인문화의 3대특징

 
1)지나(支那)문명의 발전과 그 식인문화의 전파는 그 족적이 일치한다. 
식인문화의 시작은 거의 대부분이 황하유역의 산동, 하남, 하북, 산서, 섬서성이 중심이었습니다. 시대가 흐름에 따라 점차 남쪽으로 남하해가는 특징을 찾을수 있습니다. 이어 식인문화는 지나(支那)문화의 전파에 따라 남하하여 회화유역에서 장강을 넘어 산동, 복건성으로 파급되어 집니다. 

그 파급경로는 지나(支那)인들의 강남개발과 이주의 역사와 함께 합니다. 즉 지나(支那)인이 많이 이주하면 인구가 급증하고 과잉개발에 의해 자연환경이 파괴되며 자연생태학적 균형이 깨어져 기근이 발생하고 식인현상이 발생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한나라 시대 고조 2년 부터 흥평원년에 이르는 400년 도안 식인현상은 대부분 지나(支那)문명의 시작인 황하에서만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흥평 2년 이후에는 장강, 황하일대에서도 발생하고 강남, 광동, 복건성에서 식인현상이 나타는것은 지나(支那)세력이 남하한 3-4세기 이후 동진시대 이후가 됩니다. 

2)인구과밀지역과 일치한다. 
식인현상은 대부분 인구과밀지역과 일치해서 발생합니다.변경지역이나 미개발지역이 아닌 인구 과밀 개발지역에서 출현합니다. 특히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인 장안, 낙양, 개봉, 북경, 남경, 양주, 항주등의 도시가 식인문화의 다발지역임은 주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3)정치환경변화와의 인과관계가 있다. 
노신은 고대 지나(支那)국가 성립이후의 사회를 "사람이 사람을 먹는 역사사회" 라고 못을 박았습니다. 즉 노신이 말하고자 했던것은 국가라고 하는 사적인 권력에 의해 구축된 고대국가 폭력기관이 광대한 대중을 국가라고 하는 우리에 가두고 수탈의 대상으로 삼고 우리 속의 극빈한 군중은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작용을 통해서 인구와 식량의 자동제어를 하고 자생자멸해간 결과를 이루어냈다고 하는것입니다. 

노신은 수탈의 가혹화와 인구 과밀화가 가져온 식량위기 및 자연-사회환경의 악화가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사회를 형성하고 지나(支那)의 식인문화를 창출했다고 주장합니다. 


다음편에는 식인문화를 충성심으로 미화하는 케이스를 살펴보고 식인문화를 정당화 그리고 더 나아가 미화하고 칭찬하며 여러 사람에게 본받게 함으로써 식인문화를 더욱더 부추긴 역사를 소개하고져 합니다. 
 
 

 

 

 

 

지나(支那)의 식인문화(5) 역사에 기록된 지나(支那)인의 식인

 

 

지나(支那)에서는 기원전 206년부터 19C초까지의 식인기록이 정사에 200여개가 넘게 기록되어져 있다.사기(使記)에서는 은 왕조(지나(支那)최초의 왕조)의 마지막 임금 주왕이 자신의 신하들을 해, 포, 자로 만들어 먹었다고 한다. 춘추시대 노나라 사람인 공자는 '해'를 좋아해서 식탁에 '해'가 없으면 식사를 하지 않았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던 중 위나라의 신하로 공자가 총애하는 제자 자로가 권력다툼에 밀려 처형되었고 그의 시신이 '해'로 만들어져 공자의 식탁에 올려졌다. 그 날 이 후 공자는 해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육요리분류 해 : 인육을 잘 게 썰어 소금에 절인 고기 포 : 인육을 저며서 말린 고기 자 : 인육을 구워서 익힌 고기 


본초강목(本草綱目) : 인체 각 부위의 약효에 대해 기록 
철경록(輟耕錄) : 송나라 말기에서 원대에 이르는 시대의 인육 요리법을 기록한 책 
진수의 삼국지(三國地) 
- 현덕 유비가 '포'를 즐겨먹었으며 여포의 시신을 죄인들에게 먹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 지나(支那) 정사에 나타난 식인의 시초
 

 

어제는 은나라시대의 식인사례를 게재했습니다만 그것은 정사에 기록된 사례는 아닙니다. 오늘은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즉.. 정사에 최초로 기록된 식인사례를 올리고자 합니다. 은왕조의 주(紂)왕은 대신인 구후의 딸이 절세미인이란 말을 듣고 아내로 삼았는데 그 아내가 너무도 정숙하고 외설을 좋아하지 않아 자신의 성적취향에 맞지않자 격노하고 그녀를 살해하고 그녀의 아버지 구후를 해(소금에 절인 육젓)으로 만들어 먹어버립니다. 

신하인 곽후가 이를 강력히 말리자 주왕은 곽후를 포(脯:찢어 말린고기)로 만들어 먹어버립니다. 그밖에도 주왕은 자신에게 간하는 신하 익후를 자(炙:불고기)로 만들어 먹어버립니다. 또 신하 귀후는 포로 매백은 해를 만들어 먹어버렸습니다.또 주왕은 신하인 황비호의 아내 경씨를 희롱하다 거절당하자 그녀를 해로 만들어 남편인 황비호에게 하사하고 먹게 합니다. 이에 황비호는 격노하여 군사를 일으켜 주왕을 제거하게 됩니다. 

동물세계에서나 통하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인간에도 적용되는 적나라한 사례입니다. 

 

 

 

 

 

 

# 식인의 시작 夏왕조시대 #

 

 

최초로 문헌에 기록된 식인풍습은 하나라때부터 시작합니다. 하왕조의 후예란 인물은 병사를 이끌고 약정국을 침공하여 국왕인 백봉의 궁전에 들어가 재산을 약탈하고 백봉을 살해한후 그 육신을 잘게 쪼개어 육장(肉醬)을 만들어 하나라 왕인 중강왕에게 바쳤습니다. 

즉 속국의 임금의 고기로 만든 육젓을 진미로 만들어 전리품으로 하왕에게 헌상한것입니다. 그 사건이 있고 얼마지나지 않아 후예는 그 신하인 봉몽과 자신의 애첩간의 공모에 의해 살해를 당합니다. 후예의 애첩은 과거 후예가 정복한 나라에서 전리품으로 데려온 왕녀였습니다. 

그녀는 후예를 살해한뒤 그를 역시 육장으로 만들었죠. 다음날 후예의 아들은 아버지를 찾았으나 찾지 못하자 의붓어머니에게 아버지의 행방을 묻자 후예의 육젓을 가져와 보여주며 "너의 아비가 우리나라를 멸망케하고 나의 아들을 죽여 육젓으로 담았으니 나도 너의 아비를 죽여 육젓으로 담았다. 너도 그의 아들이니 용서할수 없느나 니 아비의 육젓을 먹으면 용서해주겠다" 후예의 아들은 놀라 도망쳤으나 곧 잡혀 역시 육젓이 되었습니다. 


하왕조에서 처음으로 문서에 기록된 식인의 역사는 복수에 의한 것입니다만은 시간이 지날수록 복수 및 형벌로서의 식인에서 군량비 대신쓰는 식량으로써.. 단지 사람고기를 너무나 맛있어해서 즐기는쪽으로 발전하고 대상도 죄인, 원수에서 아무런상관이 없는 자국백성 및 부녀자로 확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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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를 옹호하려는 친지나(支那) 쥐대가리들+친지나(支那) 홍어+조선족들의 댓글에 올려 놨던 댓 글

 

 

1990년대 중반경까지 일본에서 야키니쿠(불고기) 하면  일본인들은 무슨고기로 인식하고 있었을까? 
물론 야키니쿠(불고기)는 제일교포들에 의해서 퍼진 한국요리인데  

한국에선 보통 불고기에 사용되어지는 고기라하면 일반적으로 소고기와 돼지고기 두 종류지만 
일본에선 오키나와 지역을 제외한 육지쪽에선 대체로 돼지고기로 만들어진 요리종류가 돈카츠등 몇가지 외엔 그다지 많지않고 잘 먹지 않는 편이다.  

그러다보니 1990년대 중반경까지는 일본인들에게 야키니쿠에 사용되는 고기는 누구랄것 없이 소고기 란 대답이 나왔고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다.(실제 1990년 대 초 일본인들에게 물어 보고 들은 사실) 

지금은 한국 관광와서 돼지고기맛을 알게 된 일본 관광객들에 의해 돼지고기를 찾는 일본인들도 많아진 편이다. 

고대 지나(支那:짱깨)의 해(醢)는 지나(支那:짱깨)인들에게 무슨 고기로 인식하고 있었을까~요??? 
그러고 공자놈께서는 해(醢)를 무슨 고기로 알고 즐겨 쳐 먹었을까~요?? 



他被处以最残酷的醢刑。 그가 가장 잔인한 해형에 처해졌다. 
醢时古代的一种酷刑。 해(醢)는 고대 형벌의 일종이다.

 

-흥부의 성-

국회  문죄앙 탄핵 청원 (효력없는 적와대 청원이 아닌 효력있는 국회청원임 : 10만 이상시 효력 발생)

☞ ☞ ☞   https://petitions.assembly.go.kr/status/onGoing/9EB32089E7B105CBE054A0369F40E84E

 


지나(支那)족도 혀를 내두르는 지나(支那) 혐오음식

2020-01-26 23:56:39 | 식인종 지나(支那食人文化)

지나(支那)인도 혀를 내두르는 지나(支那) 혐오음식

 

자고로 지나(支那)의 음식문화는 다양하고 독특하기로 유명하다. 독특한 재료, 희한한 요리법, 요리사의 상상력이 더해져 상상을 초월하는 ‘음식’을 창조해 내곤 한다.

가끔은 이해 불가능한 재료들로 만들어 낸 ‘별종 음식’들도 눈에 띄는데, 최근 중국 온라인 매체‘미식미언(美食美言)’에 보도된 ‘별난 재료, 별난 음식’들을 소개한다.

1. 자혈육(紫血肉)

 

 
 
 



첸동난(黔东南) 동족(同族) 음식인 ‘자혈육’의 주재료는 돼지고기와 돼지피다. 여기서 쓰이는 돼지피는 반드시 복강혈(腹腔血)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요리시 피가 쉽게 응고되기 때문이다. 요리법은 매우 간단하다. 익힌 돼지고기에 돼지피를 섞어 먹는다. 우리나라에도 소나 돼지 피로 만든 선지 음식이 있지만, 고체 상태라 먹기에 그다지 역겹지가 않다 그러나 자혈육은 돼지피를 액체 상태 그대로 돼지고기에 부어 먹는다.

2. 변변어(便便鱼)

 

 
 



‘변(便)’은 대변(大便)의 ‘변’으로 배설물을 의미한다. 어려서부터 인간의 배설물을 먹고 자란 물고기를 뜻한다. 첸동난(黔东南) 지역에서 주로 먹는다.

3. 량반계혈(凉拌鸡血)

 

 
 



꾸이양(贵阳)의 유명한 간식으로 명칭 그대로 닭피에 조미료, 야채, 땅콩 등을 넣어 버무려 먹는다. 현지 훠궈(火锅·중국식 샤브샤브) 음식점에서 판매되며, 양혈작용 및 항암 효과가 있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닭피는 반드시 깨끗하게 세척해야 하며, 청결하지 않은 경우 인체에 해롭다.

4. 찹쌀생고기(糯米生肉)

 

 
 



꾸이저우성(贵州省) 창순현(长顺县)의 별식요리다. 찹쌀에 생고기와 조미료를 섞어 항아리에 넣어 한달 간 밀봉한 뒤 꺼내 먹는다. 일반적으로 술안주로 즐겨 먹는다.

5. 취산(臭酸)

 

 
 



과거 냉장고가 없던 시절 먹다 남은 음식을 모아 밀봉한 뒤 효모로 만들었다. 한달 뒤 음식을 꺼내 다시 먹었다. 음식 모양새는 물론이요, 냄새 또한 심한 악취를 풍겨 지나(支那)인들조차 먹기를 꺼려하는 음식이다.

6. 자오씽 쥐구이(肇兴烤鼠)

 

 
 



꾸이양(貴陽) 자오씽(肇兴)에서는 가을 수확기가 되면 들에 나가 들쥐를 잡아 구워 먹었다. 들쥐를 불에 굽거나, 기름에 튀기거나, 간장에 삶는 등의 방식으로 요리해 먹는다.

7. 소똥훠궈(牛粪火锅)

 

 
 



이름만 보고 소의 분비물을 먹는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 음식은 소의 위에서 소화된 약초를 꺼내 훠궈(火锅)에 조미료로 사용해 먹는다.

8. 구붕장(狗蹦肠)

 

 
 



‘개고기 소시지’로 꾸이저우(贵州) 소수민족의 가정식 별미요리다.

9. 방귀벌레 볶음(炒放屁虫)

 

 
 



곤충을 먹는 경우는 많이 봤지만, 방귀벌레는 좀 특이하다. 그러나 ‘본초강목’에는 ‘구향충’이라 하여 신경성 위병, 신경우울증, 기력부족 등의 병에 큰 효과가 있다고 전해진다. 우선 방귀벌레는 온수물에 담궈 ‘냄새’를 제거한 뒤 말려 기름에 튀겨낸다. 여기에 고추, 산초열매, 미나리, 생강채, 박하채 등을 곁들여 먹는다.

지나(支那) 최고 잔인한 음식

한편 현재 지나(支那)에서는 금지된 ‘잔혹 음식’들도 있다. 동물들을 식재료로 삼는데, 동물을 다루는 방식이 너무나 끔찍하고 잔인해서 현재는 금지된 음식이다.

지나(支那)에서 가장 잔인하기로 손꼽히는 음식은 싼쯔얼(三吱儿), 원숭이뇌(猴脑), 탄카오루양(炭烤乳羊), 카오야장(烤鸭掌) 등이 있다.

 

 
▲ 싼쯔얼



‘싼쯔얼’은 갓 태어난 새끼쥐를 산 채로 먹는 요리다. ‘쯔얼(吱儿)’은 새끼쥐의 울음소리를 나타내는 의성어다. ‘싼쯔얼’이니 새끼쥐가 세번 ‘찍’하며 운다는 의미다. 막 세상에 태어난 새끼쥐가 접시에 담겨 나온다. 젓가락으로 살아있는 쥐를 잡아 올리는 순간 ‘쯔얼(吱儿)’, 쥐를 들어 조미료에 담그는 순간 ‘쯔얼’, 마지막으로 사람의 입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쯔얼’, 이렇게 세번 운다고 해서 ‘싼쯔얼’이다.

‘원숭이뇌’ 요리는 중간에 구멍이 뚫린 탁자에 2~4명이 둘러 앉아 구멍을 통해 원숭이 뇌를 들어올려 금속 테두리로 결박한다. 날카로운 칼로 두개골을 자르면 연두부 같은 원숭이 뇌가 보인다. 여기에 펄펄끓는 기름을 붓고, 다진 파를 얹어 수저로 젓는다. 계속해서 뜨거운 기름을 부으며 먹는다. 요리를 먹는 내내 원숭이의 참혹한 비명이 들린다.

 

 
 



‘탄카오루양’의 ‘루양(乳羊)’은 말 그대로 젖먹이 양을 뜻한다. 껍질은 바삭하고 고기는 부드러워 맛좋기로 유명한 음식이다. 그러나 이 음식을 만들어 내는 과정은 끔찍하고, 잔인하다.

우선 출산에 임박한 어미양을 숯불에 올려 굽는다. 숯불이 어미양의 전신에 붙으면 칼로 배를 갈라 어미양을 꺼낸다. 이렇게 자궁에서 막 꺼내든 어린양으로 만든 요리다. 말은 젖먹이 양이지만 어미젖을 맛보기도 전에 인간의 식탁 위에 올라오는 것이다.

 

 
 



카오야장(烤鸭掌)은 오리발바닥 요리다. 조미료를 칠한 철판에 열을 가한 뒤 산 오리를 올려둔다. 오리는 뜨거운 열기에 이리저리 뛰어 다닌다. 오리 발바닥이 불에 익으면 오리는 산 채로 발목이 잘린다. 잘린 오리 발바닥이 식탁 위에 오른다.

‘미식’은 인간의 원초적 욕망이라지만, 생명을 지닌 동물을 이토록 잔인하게 희생해 가며 만들어낸 음식이 과연 얼마나 ‘맛’과 ‘영양’을 주는지 의문이다. 지금은 ‘금지된 음식’이지만, 애초에 존재해선 안되는 음식이었지 않나 싶다.

사진=미식미언(美食美言), 바이두바이커(百度百克)

이종실 상하이(중국)통신원 jongsil74@naver.com

 

국회  문죄앙 탄핵 청원 (효력없는 적와대 청원이 아닌 효력있는 국회청원임 : 10만 이상시 효력 발생)

☞ ☞ ☞   https://petitions.assembly.go.kr/status/onGoing/9EB32089E7B105CBE054A0369F40E84E

지나와 홍어는 죽여도 된다.
특히 주변에 지나새끼들 (특히 여론조작하는 지나 유학생 먼저)이 있으면 흔적없이 죽여 버립시다!


이건 빨간 원숭이 탄핵 청원!
https://www1.president.go.kr/petitions/Temp/UQwzdP

이건 전에 내가 쓴것
https://www1.president.go.kr/forums/379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