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사태 때, 북한특수군 대거 잠입하였다? | |||||||||
-북한 특수부대가 광주에서 활동했다는 증거들- | |||||||||
이법철 | |||||||||
이 비석은 1998년 2월 8일 묘지를 새로 단장하면서 건립한 것으로 묘지의 위치는 구글지도에서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다. 158명을 포함하여 300명이 넘는 사망자의 ‘죽은 날’이 모두 한 날, 1980년 6월 19일로 기록돼 있어 이날의 의미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6월 19일은 소속부대의 ‘광주남파작전종결일’로, 되어 있었다. 즉 남파 됐다가 사망한 자들의 사망일을 일률적으로 6월 19일로 했기 때문에 제삿날이 똑같이 1980년 6월 19일로 된 것이다. 정말 이상한 사실 광주사태가 끝난 후 정부당국은 시민군측과 군인들의 사망자에 대해서 철저한 조사를 하여 발표 했었다. 신원미상의 사내들의 시신이 있었지만, 1개 대대의 변장한 북한군의 시신은 없었다고 발표하였었다. 그런데 북한군이 진짜 광주에 온 것인가? 침투한 북한군이 가장 많이 북한군이 사망한 것으로 추론되는 곳은 교도소 공격 때라고 한다. 북한군은 노출되었고, 국군은 엄폐물과 진지속에 방어의 교전을 하였기 때문에 북한군은 국군의 총탄에 대거 사망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생존한 침투 북한군은 사망한 북한군의 시신을 모두 수거하여 지정된 곳에 집단 매장하고, 북으로 귀환했을 것이라는 추론이다. 이날 김박사는 광주 인근에 북한군이 집단 매장되어 있는 곳을 하루속히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북한군 1개 대대의 특수군이 광주에서 작전한 것이 속속 정황증거가 드러나는 즈음에 김박사가 제기한 북한군 출동의 음모론이 사실이라면, 첫째, 당시 정보기관과 해안을 방어하는 군경은 과연 무엇을 했을까? 음모론에 대한 반론 1개 대대의 북한군이 어떻게 광주에 침투해 올 수 있었을까? 북한 특수군으로 광주에 직접 왔다가 훗날 탈북하여 대한민국 품에 안긴 탈북군인 김명국(가명)은 5.18 작전 총화(총결산)를 6월 15일에 했다고 했다. 그는 광주에 온 북한특수군이 400명 가까이 된다고 했다. 김명국의 증언에 의하면 칠흑같은 야음을 타고 1개 대대 병력이 모선(母船)으로 서해 바다로 와서 작은 자선(子船)으로 각기 나누워 침투했다는 것이다. 광주사태의 진실을 연구하는 학자나 보수우익 인사들은 오래전에 김명국씨를 공개석상에서 증언 할 수 있도록 노력했었다. 하지만, 공개증언은 우리의 강력한 정보기관에 의해 무산되었다 한다. 왜 진실규명을 못하게 하는 것인가? 친북, 종북인사들이 북한을 옹호하기 위한 음모의 결과인가, 아니면 신뢰할 수 없는 허위정보인 탓인가? 아니면 이한영 처럼 북에서 오는 암살자나 고첩들에게 암살당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정보기관이 보호하는 것인가? 1개 대대 병력의 북한군이 밤에 서해로 와서 광주에서 변장하여 첫째, 작전을 벌이고, 둘째, 자신들이 왔다는 흔적을 없애기 위해 동료의 시신은 훗날 찾기 쉬운 곳에 암매장하고, 셋째, 생존자는 북으로 돌아가 ‘인민영웅’칭호를 받았다는 것인데, 과연 가능성이 있는 음모설일까? 김명국씨의 증언이 사실이요, 김박사의 발표가 사실이라면, 대한민국 정보기관은 물론, 주한미군의 정보기관도 바보 멍청이라는 것이다. 그럴듯한 주장 광주사태 때 1개 대대의 북한 특수부대가 광주에 왔었다는 주장에 입을 삐죽이며, 회의를 품는 인사들에게 가능성을 강조하는 발표자 김주호박사의 동지인 백성업(가명)씨는 이렇게 주장했다. 1960년대 이래 북한의 도발양상과 규모의 변천에 대하여, 1965년 이전에는 1~2인조로 아군 전방에 침투, 정찰을 위주로 했으나, 1965년 이후 3인조 5인조 무장간첩으로 규모와 양상이 변천 해 오다가 1967년 에는 7인조 9인조로 규모가 늘고 군산 벌교 등 우리의 후방까지 침투해 왔다는 것이다. 이어서 1968년 1월 21일에 무장공비 김신조 일당 31명이 청와대 앞까지 침투해 왔을 때 그 규모와 대담성에 놀랐고, 10개월 뒤 11월에는 울진 삼척 산간 오지에 무장공비를 120여명이나 침투시켜 우리를 아연 실색케 했다며 그때로 부터 만 22년이 지난 1980년 광주사태에 600명을 침투시켰다는 것은 그리 경악할 일은 아니다고 주장하였다. 광주사태는 하루아침에 국군과 시위 시민간의 트러블에서 벌어진 우발적인 사태인가, 아니면 국내의 고첩같은 정치인을 위시하여 종북 학생, 노동자 등이 철저히 준비된 시나리오에 의해 준비된 대한민국 전복의 반란의 음모인지, 그것이 가장 먼저 밝혀야 할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결론과 제언 우발적으로 벌어진 광주사태라면, 짧은 시일안에 북한 특수부대의 기동성 있는 참여가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사전에 예비 음모된 시나리오에 의해 자행된 광주사태라면, 북한 특수부대는 광주사태 발발전 야음을 타고 광주로 숨어들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할 수 있다. 某언론인은 광주사태 기간만 고집하여 짧은 시일에 어떻게 북한군이 올 수 있느냐,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예비된 음모라면, 사전 침투하여 활동하고, 도주로, 사살된 북한군의 흔적지우기를 위해 암매장 장소를 사전 준비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광주에 온 북한군은 국군의 진압과 봉쇄에 내란에 실패하고 떼주검만 남기고 패주했다. 이날, 김박사가 제시한 증거자료를 살펴 본 서석구 변호사는 “이 정도면, 법적 증거력을 갖는 데에는 하자가 없는 자료”라고 평가 하면서, “일반국민이 쉽게 납득할 수 있도록 추가적인 증거와 자료가 보강되어 누구도 부정하거나 반론을 펴지 못 하게 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우리는, 해방 이후 한반도에 김일성왕조를 건설하려는 야욕으로 북한 독재자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3대에 걸쳐 대한민국 국민 학살을 부단히 기획, 실천해오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광주사태에도 북한군이 대규모로 남파 됐다는 데에 경악과 함께 긍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차제에 북한 세습독재자가 오는 대선에 지지하는 특정 대선후보가 대통령이 되도록 온갖 음모와 책동을 꾸미고, 장차 광주 사태 때보다 훨씬 더많은 군의 규모로 도발해올 수 있을 것에 대비하여 정부와 군은 물론 우리 국민 특히 젊은 세대들이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
李法徹(bubchul@hotmail.com/불교신문 전, 편집국장,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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