ホウケイのクジラ釣り!(흥부의 성의 고래사냥)

ホウケイじゃないのにホウケイと呼ばれる!

한재이목 묘비명(墓碑銘) - 계곡(谿谷) 장유(張維, 1587년∼1638년)

2022-12-16 02:33:17 | 한재(寒齋) 이목(李穆)(선비정신)

계곡선생집(谿谷先生集) 제10권

 

 

 

 

진용교위 영안남도병마평사 증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홍문관제학 예문관제학 동지춘추관 성균관사 이공 묘지명

(進勇校尉 永安南道兵馬評事 贈嘉善大夫吏曹參判兼 弘文館提學 藝文館提學 同知春秋館 成均館事 李公 墓誌銘)

 

 

 

 

고 영안남도 평사 증 이조참판 이공(李公)의 휘(諱)는 목(穆)이요 자(字)는 중옹(仲雍)이다.

 

성묘조(成廟朝)의 명유(名儒)로서 연산(燕山) 무오년 사초(史草)와 관련된 일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하였다.

그 묘소가 통진(通津) 상포(霜浦)에 있는데, 1백 28년이 흐른 뒤에 김공 상헌(金公尙憲)이 그 묘표(墓表)를 썼고, 그로부터 또 7년이 지나서 공의 증손인 부사(府使) 구징(久澄)이 나에게 묘지명을 부탁해 왔다.

 

아, 공이 돌아간 뒤로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공이 남긴 글을 읽어보고 그 사람됨을 상상해 보면 지금도 늠름하게 생기(生氣)가 우러나오는 듯하니, 이런 분이야말로 내가 묘지명을 써 드려야만 하리라.

 

 

공은 어려서 점필(佔畢 김종직(金宗直)의 호) 김공의 문하에 들어가 수업하면서 학문에 힘을 쏟고 문사(文詞)를 능숙하게 익혔는데, 글 중에서는 《좌씨춘추(左氏春秋)》를 좋아하였고, 옛사람 중에서는 범 문정(范文正 중국 북송(北宋)의 명신 범중엄(范仲淹))의 사람됨을 사모하였다.

 

19세 때 기유년 진사과에 제2명으로 급제하여 태학(太學)에서 노닐게 되었는데, 언론이 강개하고 지기(志氣)가 준열하여 선악(善惡)을 따짐에 있어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기 때문에 동배들로부터 추복(推服)을 받았다.

 

 

성묘(成廟)가 언젠가 병이 들자, 대비(大妃)가 시켜 기도를 행하게 하면서 반궁(泮宮)의 벽송정(碧松亭)에 음사(淫祠)를 설치토록 한 일이 있었다. 이에 공이 제생(諸生)의 앞장을 서서 무당을 몽둥이로 때려 내쫓았는데, 무당이 이 사실을 궁중에 호소하자 대비가 대로하여 상의 병이 낫기를 기다렸다가 이 일을 고해 바쳤다. 그러자 성묘가 겉으로 노한 척하면서 성균관에 명하여 그 유생들을 모두 기록해 올리도록 하였는데, 유생들이 크게 꾸지람받을 것이 분명하다고 여겨 서로 도망쳐 숨기에 바빴으나 공만은 태연히 그대로 임하였다. 그 뒤 성묘가 곧바로 대사성을 불러 하교하기를,

 

“그대가 제생(諸生)을 제대로 이끌어서 사습(士習)이 올바르게 되도록 하였으므로 내가 가상하게 여기는 바이다.” 하고, 특별히 술을 내려 주었다.

 

윤필상(尹弼商)이 정승으로 있으면서 권세를 좌지우지할 때 마침 가뭄이 들자 공이 상소하기를,

 

“필상을 삶아 죽여야만 하늘이 비를 내려 줄 것이다.”

하였는데, 필상이 공을 길에서 만나자 큰소리로 외치기를,

 

“자네는 이 늙은이의 고기를 꼭 먹어야만 하겠느냐?”

하였으나, 공은 고개를 쳐들고 걸어가며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 뒤에 필상이 암암리에 성묘를 권하여 자전(慈殿)의 뜻을 따라서 불교를 섬길 것을 청한 일이 있었다.

공이 이 말을 듣고는 또 제생(諸生)을 이끌고 상소하면서, 필상을 간사한 인물로 논하고 간귀(奸鬼)로 지목한 뒤 복주(伏誅)시킬 것을 청하였다.

이에 성묘가 대로하여 친히 공을 신문하기를,

 

“네가 어째서 나의 정승을 귀신이라고 배척하느냐?”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그의 행동이 저와 같은데도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귀신이라고 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장차 공을 형리(刑吏)에게 내리려 하였으나, 다른 정승들이 극력 변호해 준 덕분에 공주(公州)에 유배되는 정도로 그쳤는데, 이로부터 공의 직성(直聲)이 더욱 퍼지게 되었다.

 

 

그 뒤 을묘년 문과(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 겸 종학 사회(宗學司誨)를 제수받았다가 영안남도 평사로 나가게 되었는데, 급기야 무오사옥(戊午史獄)이 일어나자 공이 과연 필상의 모함을 받고서 김일손(金馹孫), 권오복(權五福) 등과 함께 참혹한 화를 당하고 말았다.

공은 사형장에 나가서도 신기(神氣)가 평상시와 다름이 없었으며 스스로 절명가(絶命歌)를 지어 부르고 죽음을 맞이하였는데, 이때가 공의 나이 28세 때의 일이다. 그런데 공에 대한 필상의 유감이 그래도 풀어지지 않아 갑자년 사화(士禍) 때에 이르러 다시 지하에 묻힌 공의 시신에 모욕을 가했으니, 아 참혹하다.

 

 

그러다가 중묘(中廟)께서 보위(寶位)에 오르면서 복관(復官)을 명하였고, 뒤에 아들이 귀하게 되자 지금의 관직을 추증받게 되었다.

 

공의 선조는 완산(完山 전주(全州)) 사람이다. 고조 백유(伯由)는 개국공신으로 완성군(完城君)에 봉해졌다. 완성이 율(栗)을 낳았는데 군기시 정에 이르렀고, 정이 손약(孫若)을 낳았는데 고성 군수(高城郡守)에 이르렀고, 고성이 윤생(閏生)을 낳았는데 부사과(副司果)로서 호조 참의를 증직받았다. 참의가 남양(南陽) 홍씨(洪氏)에게 장가들어 공을 낳았으니 이들이 공의 고비(考妣)이다.

 

 

공의 부인 김씨(金氏)는 참판 수손(首孫)의 딸이다. 아들 세장(世璋)을 두었는데 태어난 지 1년 만에 공이 화를 당하였다. 그 뒤 장성하여 문과(文科)에 급제한 뒤 관직이 관찰사에 이르렀다. 부인은 공보다 60년 뒤에 죽어 공주(公州) 서촌(西村) 김씨의 선영에 묻혔다.

 

관찰사는 5남(男)을 두었다. 맏아들 건(鍵)과 그 다음 난(鑾)과 그 다음 기(錡)는 모두 벼슬하지 않았고, 그 다음 갱(鏗)은 병조 정랑이고 철(鐵)은 좌승지인데 모두 문과를 통해 진출하였다.

딸이 셋 있는데, 맏딸은 한성 참군(漢城參軍) 정수후(鄭守厚)에게 출가하였고, 그 다음은 종실인 화릉부정(花陵副正) 수혜(秀蕙)에게 출가하였고, 그 다음은 현령 구운한(具雲翰)에게 출가하였다. 내외의 후손들이 모두 2백여 인에 달하는데, 부사 구징은 바로 승지의 맏아들이다.

 

 

 

공은 높은 재질과 준열한 절조의 소유자로서 성묘(成廟) 때 북돋아 길러졌다가 혼조(昏朝)에 이르러 젊은 나이에 일찍 꺾이고 말았는데, 지금에 와서도 사람들이 무오년의 사화를 말할라 치면 그만 기가 턱턱 막히곤 한다.

 

그러나 겨우 한 세대를 지나는 동안 자손들이 번창하여 면면히 그 뒤를 잇고 있으니, 이는 그야말로 공이 미처 누리지 못한 복을 보답받고 있는 것으로서 천도(天道)가 어긋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공의 유고(遺稿) 2권이 세상에 전해진다.

그리고 공주의 인사들이 일찍이 공이 이곳에 유배를 왔다고 하여 충현서원(忠賢書院)에서 공의 제사를 모시고 있다.

 

 

 

아, 이쯤 되면 불후(不朽)하게 되기에 충분하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아 이공이여 / 猗嗟李公

육신은 썩었어도 이름은 향기롭네 / 骨朽名芬

그 묘소 오래 되었지만 / 其墓雖故

나의 이 명 새로워라 / 其銘則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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寒齋墓碣 谿谷 張維先生集 卷 之 十

 

進勇校尉永安南道兵馬評事。贈嘉善大夫吏曹參判兼弘文館提學藝文館提學同知春秋館成均館事李公墓誌銘。

 

 

故永安南道評事 贈吏曹參判 李公 諱 穆。字仲雍。成廟朝名儒也。燕山戊午。坐史事被害。墓在通津霜浦。歷百有二十八年而金公尙憲記其表。又七年而公之曾孫府使久澄請維銘其竁。

 

嗚呼。公之沒也久矣。然讀其書想見其人。凜凜猶有生氣。是可銘也已。公少從佔畢金公受業。力學工文詞。於書嗜左氏春秋。於古人慕范文正之爲人。年十九。

中己酉進士第二名。

游太學。言論慷慨。志氣峻烈。辨覈臧否。無所回互。以此爲流輩所推服。

 

成廟嘗有疾。大妃使女巫行禱。設淫祀於泮宮之碧松亭。公倡諸生。杖其巫而逐之。巫訴諸宮中。大妃大怒。俟上疾瘳以告。成廟陽怒。命成均館悉錄其儒生。儒生以爲必獲大譴。爭亡匿。公獨不亡匿。成廟尋召大司成敎曰。爾能導率諸生。使士習歸正。予用嘉之。特賜酒。

尹弼商爲相用事。會天旱。公上疏曰。烹弼商天乃雨。弼商遇諸途。呼曰。君必欲食老夫肉耶。公昂然不顧而去。後弼商陰勸成廟請從慈殿奉佛。公聞之。又率諸生上疏。論弼商奸邪。目以奸鬼請誅之。成廟大怒。親問公曰。若何以斥吾相爲鬼。公對曰。所行如彼而人不知。所以爲鬼。上將下吏。賴他相力救。止謫公州。自是直聲益振矣。

 

中乙卯文科狀元。授成均館典籍兼宗學司誨。出爲永安南道評事。及戊午史獄起。公果爲弼商所搆陷。與金馹孫,權五福等同被酷禍。臨刑神氣如常。自作絶命歌。時年二十八。弼商恨公猶不已。至甲子之禍。戮及泉壤。嗚呼慘矣。中廟踐阼。命復官。後以子貴贈今官。

 

公之先。完山人。高祖伯由。開國功臣封完城君。完城生栗。軍器寺正。正生孫若。高城郡守。高城生閏生。副司果贈戶曹參議。娶南陽洪氏。是爲公之考妣。公之配金氏。參判首孫之女。

 

有子世璋。生一歲而公被禍。及長。擢文科官至觀察使。夫人後公六十年而卒。

葬于公州西村金氏之塋。觀察有五男。長鍵次鑾次錡。皆不仕。次鏗兵曹正郞。

鐵左承旨。皆以文科進。女子三人。長適漢城參軍鄭守厚。次適宗室花陵副正秀蕙。次適縣令具雲翰。

 

內外諸孫二百餘人。府使久澄。卽承旨之胤也。公以高才峻節。培植於成廟。

而夭椓於昏朝。至今人譚戊午之禍。爲之氣塞。然甫一世而子姓昌大。綿綿未艾。此殆公未食之報。而天道之不爽可見也。

公有遺稿二卷行於世。

公州人士。以公嘗謫於是也。俎豆公于忠賢書院。

 

嗚呼。足以不朽矣。

銘曰。

猗嗟李公。

骨朽名芬。

其墓雖故。

其銘則新。


이목묘표(李穆墓表) -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

2022-12-16 02:28:09 | 한재(寒齋) 이목(李穆)(선비정신)
 
 
  이목묘표(李穆墓表)  
 
 
         
 

증(贈)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 참판 겸 홍문관 제학 예문관 제학 동지춘추관 성균관사(吏曹參判兼弘文館提學藝文館提學同知春秋館成均館事) 행 진용교위 영안남도병마평사(行進勇校尉永安南道兵馬評事) 이공 목(李公穆)의 묘(墓)
증(贈)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 참판 겸 홍문관 제학 예문관 제학 동지춘추관 성균관사(吏曹參判兼弘文館提學藝文館提學同知春秋館成均館事) 행 진용교위 영안남도병파평사(行進勇校尉永安南道兵馬評事) 이공(李公) 묘표(墓表) 음기(陰記)

공(公)의 휘(諱)는 목(穆)이요, 자(字)는 중옹(仲雍)이니, 완산인(完山人)으로 개국공신(開國功臣) 완성군(完城君) 백유(伯由)의 4세손(世孫)이다. 증조(曾祖) 휘 율(栗)은 군기시 정(軍器寺正)이요, 할아버지 휘 손약(孫若)은 통정대부(通政大夫)로 고성군사(高城郡事)였다. 고(考) 휘 윤생(閏生)은 부사과(副司果)로 이조 참의에 증직(贈職)되었고, - 9자 빠짐 - 비(妣)는 맹준(孟準)의 따님으로 성화(成化) 신묘년(성종 2, 1471년)에 공을 낳았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효우(孝友)가 있고 충직(忠直)하였으며, 활달(豁達)하고 대단한 절개(節槪)가 있었다. 나이 14세에 처음으로 학문에 뜻을 두어 점필재(占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하(門下)에서 수업하였는데, 밤으로 낮을 삼았으니 이때부터 학업이 크게 진취하여 성문(聲聞)이 날로 전파하였다. 홍치(弘治) 기유년(성종 20, 1489년)에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하여 성균관에 유학하였는데, 그때에 마침 성종 대왕(成宗大王)이 질병이 있었으므로 인수대비(仁粹大妃)가 비밀리에 무녀(巫女)로 하여금 푸닥거리를 하게 하여, 성균관의 벽송정(碧松亭)에서 야제(野祭)를 지내게 하였다.

이에 공이 제창(提唱)하여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금하고, 더 나아가 그 무녀를 매질을 하였다. 무녀가 궁중에 하소연을 하니, 대비가 크게 노하여 임금의 질병이 낫기를 기다렸다가 상에게 고하였다. 그러자 성종이 거짓 노하여 성균관으로 하여금 그때의 유생(儒生)의 성명을 다 적어 올리도록 하였는데, 모든 유생들이 틀림없이 한번은 혼쭐이 나리라 생각하고 모두 도피하였으나 공만은 피하지를 않았다. 단자(單子)가 올라가자 성종께서 대사성에게 하교하기를, “그대가 유생들을 잘 교도(矯導)하여 선비들의 습성을 올바르게 하였으니, 내가 가상하게 여기는 바이다.”라고 하고는 특별히 상을 내렸다.


한번은 공이 가뭄으로 인하여 상소(上疏)하기를, “윤필상(尹弼商)을 삶아야만 비가 내릴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윤필상이 길에서 공을 만나 불러 세우고 이르기를, “그대가 꼭 이 늙은이의 고기를 먹고 싶은가?”라고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그렇소”라고 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윤필상이 은밀히 성종에게 권유하여 자전(慈殿)의 숭불(崇佛)하는 뜻을 청종하도록 하였는데, 공이 이 말을 듣고 또 유생들을 인솔하고 항소(抗疏)를 하여 윤필상을 간귀(奸鬼)로 지목하고 그 간사함을 극론(極論)하며 죽이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크게 노하여 친히 귀자(鬼字)의 뜻을 묻자, 공이 즉시 대답하기를, “그 소행(所行)이 이러한데도 사람들이 모르는 것을 귀신이라 하옵니다.”라고 하니, 사람들이 공의 민첩함에 탄복하였다. 임금이 장차 의금부에 내려 공을 벌하려 하였으나 수상(首相) 허종(許琮)이 힘써 구제하였기 때문에 공을 공주(公州)로 귀양을 보내는 것으로 그쳤다. 이 일로 인하여 공이 강직하다는 평판이 크게 돌았다.


을묘년(연산 원년, 1495년)에는 문과(文科)에 장원(壯元)으로 급제(及第)하여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제수되었고, 외직(外職)으로 나가 영안남도 평사(永安南道評事)가 되었다. 그때에 연산군(燕山君)의 정사(政事)가 문란하여 소인배(小人輩)들의 판이 되었다. 사람들이 공을 위태롭게 여겼는데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자 공은 과연 윤필상의 무함(誣陷)하였다는 혐의를 받고 김일손(金馹孫) 등과 함께 화를 당하였으니, 이때 공의 나이는 28세였다. 윤필상은 공에 대한 한(恨)을 그치지 않아서 갑자년에 이르러서는 육욕(戮辱)이 천양(天壤)에까지 미쳤다. 중종(中宗)께서 반정(反正)하자 공의 복관(復官)을 명하였고, 뒤에 아들이 귀하게 되어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고 관직도 겸대(兼帶)하게 되었다.


공은 집에서 거처할 때에는 신실(信實)하고 화락(和樂)하였으나 일의 시비(是非)에 대해 논할 때에는 선악(善惡)을 변별(辨別)하여 강개(慷慨)하고 매우 정직하여 회피하는 일이 없었다. 항상 우리의 도(道)인 유학(儒學)을 부식(扶植)하고 이단(異端)을 물리치는 것을 자신의 소임(所任)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그 기절(氣節)과 풍도(風度)를 한 시대에서 모두 우러러보았으나 간인(奸人)들은 이미 눈을 흘기고 틈을 엿보았으니, 마침내 공이 화를 당하게 된 것이었다. 묘소(墓所)는 통진(通津) 상포(霜浦)의 여금산(餘金山)에 있으니 선산(先山)을 따라 간 것이다. 
공이 젊었을 때에 참판 김수손(金首孫)이 대사성이 되어 성균관에서 강론할 때에 공의 사람됨을 남다르게 보아 그 딸로 아내를 삼아주었다.

 

김 부인(金夫人)은 타고난 성품이 효우(孝友)가 있었고 막힘이 없이 통달(通達)하였다. 공이 비명(非命)에 가게 되었음을 애통하게 여겨 거의 목숨을 잃을 뻔한 적이 여러 차례가 되었다.

1남을 낳았으니 세장(世璋)으로, 공이 화를 당할 때에 나이가 겨우 1살이었다. 부인이 매우 사랑하기는 하였으나 올바르게 가르쳐서 문과(文科)에 등제(登第)하여 현요직(顯要職)을 두루 거친 뒤 관찰사(觀察使)로 마감하였다. 세장은 청백(淸白)하고 근실(勤實)하기로 세상에 알려졌는데, 부인의 봉작(封爵)도 이 아들이 귀하게 된 때문이었다.

부인은 40여 년간 영화(榮華)를 누리다가 가정(嘉靖) 무오년에 노환(老患)으로 집에서 사망하니, 향년(享年)이 81세였다. 묘소는 공주(公州) 서촌(西村) 부전(浮田)의 무성산(茂城山) 기슭에 있는 김씨(金氏)의 선영(先塋) 곁에 있다. 관찰사가 일찍이 공의 묘소를 옮겨 합장(合葬)하려고 하였으나 상중(喪中)에 병을 얻어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관찰사는 5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로 맏이는 병절교위(秉節校尉) 건(鍵)이요, 다음은 사과(司果) 란(鑾)이요, 다음은 수의부위(修義副尉) 기(錡)요, 다음은 문과(文科) 병조 정랑(兵曹正郎) 갱(鏗)이요, 다음은 문과 승지(承旨) 철(鐵)이며, 딸로 맏이는 한성부 참군(漢城府參軍) 정수후(鄭守厚)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종실(宗室) 화릉 정(花陵正) 수혜(秀蕙)에게 출가하였으며, 다음은 현령(縣令) 구운한(具雲翰)에게 출가하였다.


아! 하늘이 뜻을 정하면 능히 사람을 이긴다고 한 것을 공에게서 더욱 징험(徵驗)하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공을 화가 미치기 전에 보전하여 정론(正論)을 오래 가게 하고 사림(士林)에게 복이 되게 하지 못한 것은 어쩌면 하늘이 정하지 않아서 그리된 것일까? 아니면 운수(運數) 소관(所管)이라서 하늘도 어찌할 수 없었단 말인가? 서운할 일이고 통탄할 일이로다.
 

천계(天啓) 5년(인조 3, 1625년) 5월 16일에 세우고,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도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예문관 직제학 상서원 정(承政院都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藝文館直提學尙瑞院正) 김상헌(金尙憲)이 글을 짓다.

 
 
 

차의 다섯가지 공과 덕

2022-12-16 02:16:59 | 한재(寒齋) 이목(李穆)(선비정신)

차의 다섯가지 공과 덕

 

 

이목(李穆, 1471~1498)

     호는 한재(寒齋)로 도학자(道學者)요 문인이었다. 19세에 진사에 합격하여 성균관 유생이 되었고 25세에 중광문과(增廣文科)에 장원하고 이어 영안도평사(永安道評事)가 되었다. 곧고 강직한 성품을 지녔으며 무오사화 때 윤필상의 모함으로 사형되었다. 저서로는 『이평사집(李評事集)』이 있다.
     그는 1,323자의 다부(茶賦)를 지어 차의 현묘함을 노래하였다. 차는 일생동안 즐겨 맛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 것은 그 성품 때문이다.라고 시작된 다부에는 <차 이름과 산지><차나무의 생육환경과 예찬><차달여 마시기><일곱 잔 차의 효능><차의 다섯가지 공로(五功)><차의 여섯가지 덕성(六德)>을 열거하였다.

 

 

차의 다섯가지 공


① 책을 볼 때 갈증을 없애준다.
② 울분을 풀어준다.
③ 손님과 주인의 정을 화합하게 한다.
④ 뱃속 기생충으로 인한 고통을 없앤다.
⑤ 취한 술을 깨게 한다.

차의 여섯가지 덕


① 오래 살게 한다.
② 병을 낫게 한다.
③ 기운을 맑게 한다.
④ 마음을 편하게 한다.
⑤ 신선과 같게 한다.
⑥ 예의롭게 한다.


    『다부』의 끝 부분에 그가 다인의 경지를 뛰어 넘어 도인의 경지에 다달았음을 알 수 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풍파가 모질도다.

양생에 뜻을 두니 너(차)를 버리고 무엇을 구하랴.

 

나는 너를 지니고 다니면서 마시고 너는 나를 따라 노니,

꽃피는 아침 달뜨는 저녁에 즐겁기만 하네.

 

곁에 하늘이 있어 두려워하며 경계하여 이르기를,

삶은 죽음에서 비롯하며 죽음은 삶의 뿌리이니

안(內:죽음)을 치중하여 다스리면 겉(外:삶)은 시들게 되리……

 

신령스런 기운이 움직여 묘한 경지에 들어,

즐거움은 다스리지 않아도 저절로 이르게 되도다.

 

이것 역시 내 마음의 차(茶)이거늘(필자 주:차를 안 마셔도 마신 것 같다)

또 어찌 반드시 저것(차)에서 구하리오.

  

http://www.riss4u.net/link?id=A19713784                 
초록
한재(寒齋) 이목(李穆)은 오늘날 학계에서 활발하계 연구되고 있는 인물은 아니다.
 
1980년대 중반부터 그의 「다부(茶賦)」가 차(茶) 동호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전에 비해 관심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학술사상에 대한 연구는 사실상 전무한 상태에 있다.
 
한재는 '거인유의(居仁由義)'의 표본적인 인물이다. 그는 단순한 실천가가 아니요, 이론을 겸비한 실천가이다. 조선 순조 때 사학(四學) 유생들이 그의 도덕과 절의를 추앙하여 '선비 정신의 귀감'으로써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도록 청했던 사실은 사림(士林)에게 그의 위상이 어떠하였는지를 짐작케 한다고 할 것이다.
 
그동안 그의 학문세계가 절의에 가려져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던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만시(晩時)의 탄이 있기는 하지만, 이제라도 그의 학문과 사상에 대한 연구는 필요하다고 본다,
 
한재에게 있어서 '차'의 위상은 상당하다. 그는 차문화(茶文化)의 선구자로 받들어지고 있다. 그러나 '차'는 결코 그의 본령일 수 없다. 그의 본령은 도학에 있고 '기다(嗜茶)'는 하나의 여사(餘事)에 속한다.
 
후학의 입장에서 각자의 관심사나 취미·기호에 따라 연구할 수는 있지만, 그의 학문과 사상의 본령이 무엇인지는 분명히 인식해야 될 줄로 안다.

목차
목차가 있습니다.
자료제공 한국학술정보 에서 제공하는 논문입니다.
 
http://www.riss4u.net/link?id=U9988882_002                 
초록
 본 연구는 한국 차문화의 정신문화적 측면의 개념 정립이 미흡한 실정에 착안하여, 정신적 위상이 반영되어야 할 차문화의 진의를 되찾고 그 폭을 넓혀 진일보한 차생활 영위와 교육이 이루어 질 수 있도록 올바른 방향을 모색(摸索)하는데 목적을 두었다.

 연구대상인 한재의 생애와 도학(道學)정신이 차를 통한 수양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다부(茶賦)」를 통해 사상적 기반을 파악하였으며, 「다부」에 나타난 한재의 차정신의 역사적 위상을 살펴봄으로써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를 제시하는지를, 오늘에 당면한 문제와 연결시켜 현대적 의의를 논하였다. 

 우리나라 선비문화의 원류를 이루었던 한 사람인 한재(寒齋) 이목(李穆, 1471~1498)은 일세(一世)를 빛낼 인물이었지만 온축(蘊蓄)한 경륜과 포부를 제대로 펴 보지도 못한 채 28세로 생애를 마감하였다. 항상 자신의 도에 어긋나지 않도록 일의 시비(是非)를 가리고 선악을 분별함에 있어 굳고 곧아서 그의 기절과 풍채는 흠모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가 저술한 「다부」는 지금으로부터 500여년전 '부(賦)'라는 문체적 특성을 바탕으로 차의 정신적 위상을 반영한 유가(儒家)의 산물이다.
당시는 문(文)을 통해 사상을 표현하던 시기인 만큼 「다부」에도 유가의 철학과 도가의 정신이 간결한 문장 속에 깃들어 있다. 이에 「다부」의 사상적 기반은 유교사상을 기반으로 하고 노장사상을 취사한 사상체계로 두드러진 특징을 이루고 있다.

 유자인 한재는 존현사상(尊賢思想)에 입각하여 「다부」를 저술하였고, 노장사상(老莊思想)의 바탕 위에 유교의 시각으로 차의 칠수(七修)·오공(五功)·육덕(六德)을 논하였으며, 노장과 신선사상의 경지를 칭송하며 유·도 사상을 섭렵하였다.
 
그러나 맺음말에서 삶과 죽음의 근본이 하나라고 하여 양생(養生)의 한계를 우회적으로 드러내며 그의 사상적 기반이 유교에 있음을 밝혔다.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실천적 도를 기본정신으로 삼고 있는 한재에게 차란 구도(求道)와의 연결이었다.
높은 정신적 경지를 추구하는 수양방법의 일환으로 차의 성품에 주목하였으며 나아가 단순한 음료의 차원을 벗어난 정신적 매개체의 역할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한재의 올곧은 성품은 당세(當世)의 어지러운 시류와 영합하기에는 그 뜻이 맞지 않았다. 시대적 상황에서 파생되는 환경적 요인은 한재로 하여금 차의 성품에 더욱 매진하게 하였으며, 그가 철학을 담아 명명한 차의 이명(異名)인 '한'과 '파'에서 그 진의를 확인 할 수 있었다.

 한재는 '한'을 통해 자신의 본성을 찾으려 했고, 나아가 '파'를 통해 시대적 삶의 역경을 극복하고자 했다. 유가의 도학과 심학(心學)에 입각하였던 한재는 차와 마음이 분리될 수 없다고 하여 '차심일여(茶心一如)'의 사상을 강조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오심지차(吾心之茶)'라는 차정신의 결정을 도출하였다.
 
'오심지차'는 한재의 차정신의 주체이다. 한갓 논리적 인식의 대상이 아닌 이미 마음속에서 용해되어 주체적으로 자각할 수 있는 정신을 가리키는 것이다.
정신적인 가치보다는 물질적인 가치를 우월하게 생각하는 현 시점에서 '오심지차'는 인간의 정신적 궁핍으로부터의 탈피에 적지 않은 역할을 할 것이다.

 즉, '내 마음의 차'로 차정신을 고취시킴으로써 현대차문화의 정신을 회복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하게 될 것이며, 우리가 실천해야 할 귀중한 정신적 유산으로 '한재의 차 정신'은 무한한 발전의 가능성을 지닌 차계(茶界)에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하게 될 것이다.

 Hanjae Imok(寒齋 李穆 A.D 1471~1498) one of the persons who is formed the original stream of classical scholar culture of our country. Also a person who brightened the time by writing a book called 'Daboo'(茶賦), the writing which praised tea. Tragically ending his life at the age of 28 he failed to spread his accumulated administration and aspiration right. 
 To examine his thought tendency through the Daboo(茶賦) of Hanjae, he mastered the philosophy of Lao-tze and Chung-tze by accepting and taking it positively on the basis of Confucianism. This is the conspicuous feature over the whole of thought system of Daboo(茶賦). So, the will may be confirmed from the writing motive that he, himself who was a Confucian tried to write Daboo(茶賦) with a sense of responsibility of the thought to respect sage. But, he understood the cause and effect of tea from the viewpoint of Confucianism throughly, while he recognized the viewpoint and feature of the philosophy of the Lao-tze and Chung-tze completely. 
 Tea enabled Hanjae who was regarding the practical reason to cultivate oneself and govern people as basic spirit to notice the character of tea as the connection with seeking after truth and a part of training method to seek high spiritual state. Furthermore, it came to settle as the role of spiritual beverage to break from the dimension of simple beverage. 
 This can be confirmed from the fact that he tried to find the character of tea and he tried to be the character of tea through 'Han'(□) and 'Pa' which are the another names of tea that he named originally. The honest character of Hanjae was not suitable for going with the confused lifestyle of his times, and the environtmental factor to be derived from period situation enabled him to fall into the character of tea. 
 That is, what he took as a means to keep himself and cultivate the world in the corrupt world was that he tried to empathize the loft character and life of tea by attaching grass head on Han(□) which is the pen name of his own and Pa which is the origin of all the storms of life. 
 In Hanjae, subjective tea spirit is not simply the metaphisycal essence of the subject of logical recognition. But, he tried to express the tea spirit to be able to say subjective awakening by being melted in his mind. 
 Thus, Hanjae who emphasized mind learning with Confucian philosophy in the teaching of Confucius is deducing the tea spirit that I and tea are same through the thought that tea and mind are same that 'tea and mind are inseparable'. 
 That is, at the present point of time to uplift the tendency of thinking to think material value and sense principle superiorly to spiritual value, that 'my mind is tea', the tea spirit of Hanjae which appeared in Daboo(茶賦) will play much role for the sloughing from the spiritual want of human beings, and it will present the educational milestone toward the efforts for the settlement of right tea 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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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부 茶 賦 (茶의 / 五功 / 六德) 차의 다섯가지 공과 덕<<이평사집 李評事集>>

2022-12-16 02:04:24 | 한재(寒齋) 이목(李穆)(선비정신)

 

제목:   茶 賦 (茶의 / 五功 / 六德) E-MAIL:  chmyung@empal.com
 
 homepage:  http://www.teaunion.or.kr
 
 작성자:  차인연합회 등록일:  2005/05/24 조회수:   2019
 
 

< 茶 賦 > 차노래

- 寒 齋 李 穆 先生 (1471-1498년) 

- 25세 때인 1495년경 지음 -

茶 父, 茶 仙으로 추앙 받는 한재 이목 선생은 
성종 2년 1471년 경기도 김포군 하성면 가금리 - 참의공 李閏生의 차남으로 출생
8세 취학, 14세 부터 성리학자이며 茶人인 점畢齋 金宗直 선생 문하에서 修業
19세 초시 갑과 합격 생원 진사, 24세 연경(北京)에 유학
25세 燕山元年 별시 문과에 壯元及第 하였고 그무렵 茶賦를 저술하였다

草衣禪師(1828-茶神傳, 1837-東茶頌 지음) 보다 315년 앞서 태어나
15 세기 말경 즉 1495년 조선조 초기에 중국을 다녀온 후
茶에관한 우리나라 최초의 전문 茶書 "다부"를 지어 
차의 특성과 현묘함을 노래 하였다.
賦文은 구구절절이 음다생활의 체험에서 맺혀난 술회이다.

茶生活의 저변에 노장사상이 혼재되어 養生에서 君子之道에 이르는 이상을
茶性에 결부시켜 仙界에 이르기까지 확대시켰다.
茶賦는 먼저 쓴 동기와 배경을 병서에 적고 차의 産地, 생활환경, 煎茶
효능을 七修, 五功, 六德으로 나누어 노래하고 끝에 자신의 茶精神을 피력했다.

茶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養生에는 良藥이요, 정신에는 청량제니 그것은
차가 천지의 순한 기운을 머금고 日月의 精華를 호흡했기 때문이다
지난 역사 속에 선인들이 즐겼듯이 잠시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 있었으니
그의 정신 속에는 언제나 "내 마음의 차"(吾心之茶)가 가득차 있었다. 

안타까운 것은 천재 茶人인 선생은 어이 없게도 연산군 4년(1498년7월) 戊午士禍 때
28세의 꽃다운 나이에 화를 당했으니...
그당시 사회가 상생하는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면 이 아름다운 차의 정신은
온 나라에 두루 퍼져 순후한 다풍을 진작시켰을 것이다.

실천윤리를 선비의 생활 신조로 삼았던 근조선은 물론, 21세기의 현대인까지 
선생의 사풍(士風)은 추앙을 넘어 외경(畏敬)되고 있다.

선생 서거후 전통문화와 겨레의 얼은 급격히 쇠락 하였으니 
이분이 이때 화를 당하지 않으셨다면 이나라의 茶文化는 더욱 찬란히
빛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 저작동기- 차를 칭송한 글이 없음은 어진이(賢人)를 버려 둠과 같기 때문에 쓴다

三 品 / 七效能 / 五 功 / 六 德

- 茶의 등급으로서 三 品

1. 상품 - 몸을 가볍게 하는 것이 上品
2. 중품 - 지병을 없애 주는 것이 中品
3. 차품 - 고민을 달래주는 것이 그 다음 次品이다.

- 茶의 7가지 효능 (七段階 修身求道)

1. 한잔을 마시니 메마른 창자가 눈녹인 물로 씻어낸 듯 깨끗이 씻겨내리고
2. 두잔을 마시니 마음과 혼이 상쾌하여 신선이 된 듯하고
3 .석잔을 마시니 병골에서 깨어나 두통이 없어지며 孔孟의 浩然之氣를 기르네
4. 넉잔을 마시니 가슴에 웅호한 기운이 생기며 울분의 기운을 비우고
5. 다섯 잔을 마시니 색마가 놀라 달아나고 탐욕이 사라지며
6. 여섯 잔을 마시니 세상의 모든 것이 거적떼기에 불과하며
해와 달이 방촌에 들어 신기함이 하늘나라에 오르는 듯하고
7. 일곱 잔은 채 반도 비우기 전에 맑은 바람이 울울이 옷깃에 일어난다.

- 茶의 5가지 공로 (五功效)
차의 다섯가지 공효를 역사사실을 통해서 집약 부술 함

1. 목마른 갈증을 풀어주고
2. 마른 창자와 가슴의 울적함을 풀어주고
3. 주 객의 정을 서로 즐기게 하고
4. 뱃속의 중독에 대한 해독으로 소화가 잘되게 하고
5. 숙취에 대한 정주 즉 술을 깨게 해독해 준다.

- 茶의 6가지 德性

사람으로 하여금

1. 사람이 천수를 누리고자 순요와 대순의 덕을 갖추고
2. 병고를 그치게 하고자 유부 편작의 덕을 갖추고
3. 기을 맑게 하고자 백이와 양진의 덕을 갖추고
4. 마음을 편케 하고자 이로 사호의 덕을 갖추고
5. 선인(仙人) 이고자 황제와 노자의 덕을 갖추고
6. 예(禮)에 서고자 주공과 공자의 덕을 갖춤이다.

- "하늘의 성(性)이 바로 나의 성이고
하늘의 마음(心)이 내 마음이며
하늘의 도(道)가 나의 도요
하늘이 좋아하고 싫어하는(好惡) 바가 
바로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바이니
까닭에 내 마음 안에 하늘의 마음이 있다 (吾心之內在天心) " -

- 한재 선생은 철저한 道學者요, 실천하는 茶人 이었다.

- 공부하기 위해 집을 떠나는 동생에게 준 詩한수 -

" 우리집안 예로부터 글을 했기에
책을 즐겨하고 재물에는 생각없었네
부모님 이미 늙으시고
우리는 아직도 서생의 몸이라네
바위 옆 노송 위에 학의 꿈 영글고
달빛 아래 집 주변엔 차연기 피어나네
도를 구함에 한결같이 하고
산봉우리 위의 구름일랑 한눈 팔지 말게나 "

(名利에 현혹되는 일이 없기를 당부한 내용으로
鶴夢은 집안의 품위요, 茶煙은 그의 정신이었다)

이것이 바로 陸羽의 茶經을 읽고 터득한 茶性의 실천이다
그는 祭禮 때도 철갱봉다(撤羹奉茶)를 철저히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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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재(寒齋) 이목(李穆)

2022-12-16 01:48:32 | 한재(寒齋) 이목(李穆)(선비정신)

 

茶仙(다선) 寒齋(한재) 李穆先生(이목선생)

 

茶仙(다선) 寒齋先生(한재선생)의 諱(휘)는 穆(목), 字(자)는

仲雍(중옹), 号(호)는 寒齋(한재) 諡号(시호)는 貞簡(정간)이다.

本(본)이 全州(전주) 李氏(이씨)로서 始祖(시조) 翰(한)의 十五 世(십오세)에 이르러 侍中公派 端信(시중공파 단신)과 璿源派 勇夫(선원파 용부)로 分派(분파)되어 始祖(시조) 翰(한)으로부터

二十七 世孫(이십칠세손)參議公 閏生(윤생)의 次男(차남)으로

경기도 김포시 하성면 가금리에서 태어나 八歲(팔세)에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十四歲(십사세)에 점필재 金宗直(김종직)의 門下(문하)에서 남효은, 정여창, 김굉필, 김일손등과 같이 학문을 닦기 시작한 수재자 였다.

 

十九歲(십구세)되던 成宗(성종) 二十年(이십년)에 소과 진사과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을 하였다. 이 무렵 참판 金首孫(김수손)이 대사성으로 성균관에서 강론하면서 선생의 비범함을 알고 사위로 삼았다.

 

성종이 병석에 눕자 대비가 무당을 시켜 벽송정에서 음사를 벌리는 무당을 쫓아내고 제단을 부수어버리고 윤필상을 간괴라 상소하여 오히려 공주로 유배되었다.

 

二十四歲(이십사세) 땐 연경 중국에 유학하였다.

一千四百九十五年(일천사백구십오년)에는 왕을 우롱하였다고 노사신이 간하여 二十五歲(이십오세) 나이에 두 번째 유배되었으나 성균관 유생들의 상소로 곧바로 풀려나기도 한 忠直(충직)하고 强直(강직)하며 不義(불의)에 굴하지 아니하는 학자이시다.

 

二十五歲(이십오세) 되던 연산 원년엔 드디어 大科(대과)에서 登庸人才策問(등용인재책문)에서 天道策(천도책)으로 답하여 壯元及第(장원급제)를 하였다.

 

茶仙(다선) 寒齋先生(한재선생)은 正六品(정육품)의 성균관 典籍(전적)과 宗學司誨(종학사회)를 제수 받았고 다음 해인二十六歲(이십육세)엔 進勇校尉(진용교위)로 영안남도 병마평사로 부임했다.

 

二十七歲(이십칠세)가 되던 해에 湖堂(호당)에서 賜暇讀書(사가독서)를 했다. 이해 六月에 아들도(世璋) 낳았다.

 

燕山君(연산군) 四年(사년) 戊午士禍(무오사화)에 김일손. 권오복과 함께 二十八歲(이십팔세)를 일기로 斬首(참수)되었다. 그 후 甲子士禍(갑자사화) 때 剖棺斬屍(부관참시)란 혹형을 당했다.

 

이후 中宗(중종)이 등극하자 선생은 억울한 죄명이 벗겨져 복직되고 가산도 환급 받았다.

明宗(명종) 七年(칠년)에 종이품인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홍문관 제학. 예문관제학. 동지춘추관 성균관사를 증직 받았고 명종 十四年(십사년)에 공주공암 소재 충현서원(忠顯書院)에 배향됐다.

 

청음 金尙憲(김상헌)이 선생의 墓表文(묘표문)을 짓고, 계곡 張維(장유)는 墓誌銘(묘지명)을 지었다.

肅宗(숙종) 四十三年(사십삼년)에 資憲大夫(자헌대부), 吏曹判書兼弘文館 大提學(이조판서겸성균관대제학), 禮文官大提學(예문관대제학), 世子左賓客(세자좌빈객), 五衛都摠府(오위도충부) 都摠管(도충관)등 正二品의 관직을 추증 받았고 景宗(경종) 이년에 貞簡(정간)이라는 諡號(시호)가 내려졌다.

 

英祖(영조) 二年에 선생의 절개를 영원히 기리도록 不祧之典(부조지전)을 명받았다.

正祖(정조) 五年(오년)엔 全州(전주) 黃崗書院(황강서원)에도 배향되었다.

 

한편 선생께서는 학문을 하는 여가에 茶(차)를 嗜好品(기호품)으로 愛用(애용)했다.

茶(차)에 관한 우리나라 최초의 문장인 茶賦(다부)가 선생의 著書(저서) 李評事集(이평사집)에서 一千九百八十年代에 발견되어 茶界에서 先生의 茶賦를 再 照明하기 시작했다.

陳甲坤(진갑곤) 편 『한국문집총색인』을 보면, 茶仙(다선) 寒齋(한재) 이전까지는 茶(차)에 관련된글로 茶仙(다선) 寒齋(한재)의「다부」와 같이 짜임새 있고, 분량이 있는 것은 단 한편도 없다.

초의 선사 전까지 茶仙(다선) 寒齋(한재)의 「茶賦(다부)」가 사실상 唯一無二(유일무이)하다고 할 것이다.

 

茶仙(다선) 寒齋(한재)의「茶賦(다부)」는 내용의 獨創性(독창성)에 있어서도 中國(중국) 晉(진)나라杜毓(두육)의 荈賦(천부)라든지 唐(당)나라 顧況(고황)의「茶賦(다부)」宋(송)나라 吳淑(오숙)의「茶賦(다부)」와 비교 할 때 단연 그 오른편에 선다고 할 수 있다.

 

陸羽(육우)의「茶經(다경)」과 盧仝(노동)의 “七碗茶歌(칠완다가)”를 비롯한 中國(중국)의 여러 문헌을 빠짐없이 섭렵 참고 한듯하지만 표현상으로는 換骨 奪胎(환골탈퇴)에 가까운 기법을 보이고 있다.

이 점은 楚辭(초사)」의「橘頌(귤송)」한 대목을 이끌어 첫머리를 장식하는 등 여러 참고 문헌에서많은 문구들을 직접 간접으로 인용한 「동다송」과는 구별된다.

 

茶仙(다선) 寒齋(한재) 李穆先生(이목선생)의 「茶賦(다부)」가 이와 같이 평가되고 있는 것은 만큼 茶道(다도) 茶史(다사)의 측면에서 그에 대한 조명이 반드시 뒤 따라야 한다.

1333자로 된 茶仙(다선) 寒齋(한재) 李穆先生(이목선생)의 茶賦(다부)는 수십 가지에 이르는 茶(차)의 명칭. 생산지. 품질 등을 자세히 기술하고 차의 미묘한 미각이 주는 五功(오공) 六德(육덕) 七效能(칠효능)까지 설파한 장문의 시로서 茶界(차계)에서 茶仙(다선) 寒齋(한재) 李穆先生(이목선생)의「茶賦(다부)」을 높이 評價(평가)하여 선생을 茶父(다부) 또는 茶仙(다선)이라 推仰(추앙)하고 해마다 寒齋祠堂(한재사당=貞簡祠(정간사))을 찾아 獻 茶禮(헌다례) 행사를 하고 있다.

 선생의 作品(작품)에는 茶賦(다부) 以外(이외)에도 賦(부). 時(시). 疏(소). 啓(계).策(책)解(해). 記(기). 頌(송)등 天才的인 名文作(명문작) 들이 있다.

茶仙(다선) 寒齋(한재) 李穆先生(이목선생)의 묘소는 경기도 김포시 하성면 가금리 산76-1번지에 있으며 貞簡祠(정간사)에서 不祧之典(부조지전)으로 每年(매년) 七月(칠월) 二十六日(이십육일) 午前(오전)十一時(십일시)에 祭享(제향)을 올리고 있다. <참고 反浦精舍>

 

이목 ,李穆 (1471 ~ 1498)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자는 중옹(仲雍), 호는 한재(寒齋)이다. 조선초 개국공신으로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봉해진 이백유(李伯由)의 현손이며, 부친은 참의 이윤생(李閏生)이고, 어머니는 홍맹부(洪孟阜)의 딸 로 1471년(성종 2)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났다.  


8세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14세에는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연마하기 시작하였다. 1489년 19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는데, 이 무렵 참판 김수손(金首孫)이 대사성으로 성균관에서 강론하면서 그의 비범함을 보고 사위로 삼았다.


태학생으로 있던 1490년, 당시 성종이 몹쓸 병에 걸리자 대비가 무녀에게 명하여 성균관 벽송정(碧松亭)에 제단을 차려놓고 기도를 하게 하였다. 이에 이목이 동료들을 이끌고 가서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하고 무녀를 매질하여 내쫓자 대비가 크게 노하여 왕의 병환이 낫기를 기다렸다가 고하였다.

 

왕이 거짓으로 노한 체 하면서 성균관에 명을 내려 당시 유생들의 성명을 모두 적어 올리도록 하였는데, 다른 유생들은 모두 견책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다투어 도망하였으나, 이목만은 피하지 않고 당당히 명단을 적어 들어갔다.

성종이 그 기개(氣槪)를 가상히 여기고, 대사성을 불러ꡒ그대가 능히 유생들을 거느리고 솔선수범하여 선비의 습성으로 정대함을 따르려 하니 내가 가히 서용할 만 하다.ꡓ하고 특별히 술을 하사하였다.


1492년(성종 23) 나라에 심한 가뭄이 들자 당시의 재상이었던 윤필상(尹弼商)이 정권을 제멋대로 휘두르기 때문이라고 격렬히 탄핵하면서 상소를 올려 “윤필상을 삶아 죽여야 하늘이 비를 내릴 것입니다.ꡓ라고 하였다.

 

또 윤필상이 왕에게 대비의 뜻을 받들어 숭불(崇佛)할 것을 청하자 또다시 여러 유생들을 거느리고 항소하였는데, 윤필상을 지목하여 ‘간귀(奸鬼)’라 칭하므로 성종이 크게 노하여 “네가 어찌 감히 내가 존경하는 대신을 귀신이라 하느냐?” 하고 묻자

그는 “그의 간사한 소행을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하니 귀신이라 하였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왕이 대신을 능욕한 죄를 물어 그를 엄중하게 처벌하고자 하였으나, 대간과 신하들의 만류로 풀려났다.

 


1495년(연산군 1) 정희량 등 성균관 유생들과 함께 두 대비가 부처를 섬기는 일과 세조가 숭불(崇佛)한 일의 잘못을 지적하고 불사(佛事) 즉 이단(異端)을 멀리할 것을 청하다 공주에 유배당하였다.

그러나 곧 풀려나 그해 25세의 나이로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으로 종학사회(宗學司澮)를 겸하였고, 이듬해에는 연안도 평사로 나갔다.

1497년에는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실록청 낭관이 되어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498년(연산군 4) 윤필상과 유자광 등 훈구대신들이 김일손(金馹孫)이 성종실록 사초(史草)로 제출한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것을 비방한 글’이라고 연산군에게 일러바침으로써 이미 죽은 김종직은 물론 그의 문인(門人) 대부분이 화를 당하는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났다.


이목 또한 김종직의 문인으로 김일손․권오복․허반․권경유 등과 함께 체포당하여 갖은 고문을 받은 후 사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그는 형장에 나아갈 때 조금도 안색이 변하지 않고 스스로 「절명가(絶命歌)」를 짓고 죽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 28세였다. 당시 그가 지어 부른 절명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검은 까마귀 모이는 곳에 흰 갈매기야 가지마라
저 까마귀 성내어 너의 흰빛을 시새움하나니
맑은 강물에 깨끗이 씻은 몸이 저 더러운 피로 물들까 두렵도다
책을 덮어놓고 창문을 밀쳐 열고 보니
맑은 강물 위에 흰 갈매기가 더 노니는도다
우연히 침을 뱉고 보니 흰 갈매기 등에 묻어버렸네
흰 갈매기야 성내지 마라. 저 세상 사람이 더러워서 침을 뱉았노라

그후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자 관을 쪼개어 시신의 목을 베는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고, 그의 집은 깎여 나가 평지가 되었다.


중종반정 후 1507년(중종 2) 신원이 회복되고 적몰되었던 가산도 환급 받았으며, 1552년(명종 7)에는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홍문관제학 예문관제학 동지춘추관 성균관사에 증직되었다.


1717년(숙종 43)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세자좌빈객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추증되었고, 1722년(경종 2)에는 ‘정간(貞簡)’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1726년(영조 2) 부조지전(不祧之典)을 내려 그의 절개를 영원히 기리도록 하였다.


인조 때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이 묘표(墓表)를 지었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ꡒ우리나라의 도(道)를 붙잡고 이단을 물리치는 것이 이러한 것이니 그것은 큰 뜻이다.ꡓ라고 하였다.


1571년(선조 24) 공주 공암서원(孔岩書院, 현 忠賢書院)에 제향되었고, 1781년(정조 5)에는 전주의 황강서원(黃岡書院)에 배향되었으며, 1848년(헌종 14) 고향인 김포에 그의 위패를 봉안한 한재당(寒齋堂)이 건립되었다. 

(성종실록, 연산군일기, 중종실록, 선조실록, 효종실록, 현종실록, 숙종실록, 영조실록, 문과방목, 국조인물고, 연기인물지, 공주시지, 김포시지, 충남의 서원․사우, 공주의 향교와 서원․사우, 공주의 지리지․읍지, 공주시지) 

 

 

성명(姓名)

 이목(李穆)

본관(本貫)

 전주(全州)

시대(時代)

1471(성종 2)∼1498(연산군 4)

자(字)

중옹(仲雍)

호(號)

한재(寒齋)

이력(履歷)

이목(李穆)  1471(성종 2)∼1498(연산군 4)

조선의 문신. 자는 중옹(仲雍), 호는 한재(寒齋), 시호는 貞簡(정간), 開國功臣(개국공신) 伯由(백유)의 후손, 閏生(윤생)의 아들. 金宗直(김종직)의 문인. 19세로 進士試(진사시)에 합격, 성균관 儒生(유생)이 되어 王大妃(왕대비)가 성균관에 淫祠(음사)를 설치하여 무당을 부르자 이를 쫓아냈으며, 한편 유생을 이끌고 尹弼商(윤필상)을 탄핵하다가 公州(공주)에 付處(부처)되었다.뒤에 풀려 나와 1495년(연산군 1) 增廣文科(증광문과)에 장원, 賜暇讀書(사가독서)를 했고, 典籍(전적)으로 宗學 司誨(종학사회)를 겸하고, 이어 永安道 評事(영안도평사)가 되었다.1498년(연산군 4) 戊午士禍(무오사화)에 尹弼商(윤필상)의 모함을 받고 金馹孫(김일손)·權五福(권오복) 등과 함께 사형되었다. 甲子士禍(갑자사화:1504) 때 다시 剖棺斬屍(부관참시) 되었다가 뒤에 伸寃(신원), 이조 판서에 追贈(추증), 公州(공주)의 忠賢書院(충현서원)에 祭享(제향).

 

 

이 름 : 이목(李穆)   시중공派  

자료종류 : 현조약기   생몰 : 1471∼1498  

자는 중옹(仲雍), 호는 한재(寒齋). 백유(伯由)의 현손이며 호조참의 윤생(閏生)의 아들이고 목사 수(?)의 동생이다. 점필재(컒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19세에 진사가 되었다. 태학에 있을 때 성종대왕이 병이 있어 대비가 무녀를 시켜 반궁(泮宮)의 벽송정(碧松亭)에 기도를 베풀었을 때 공이 태학생들을 데리고 무녀를 곤장을 쳐서 쫓아내었는데 후에 성종대왕이 이 사실을 알고 노하여 성균관에 명하여 당시의 유생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유생들이 모두 도망하였으나 공은 홀로 도망하지 않아서 성종의 칭찬과 술을 받았다. 윤필상이 정승으로 있을 때 한발이 심하자 공이 유생을 이끌고 윤필상을 탄핵하다가 공주로 귀양갔다. 이로부터 바른 말을 잘한다는 소문으로 명성을 더욱 떨쳤다. 뒤에 풀려나와 1495년(연산군 1)에 증광문과에 장원하여 호당에 들어가 사가독서하고 전적(典籍)으로 종학사회(宗學司誨)를 겸하고 이어 영안도평사(永安道評事)가 되었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에 윤필상의 모함을 받아 김일손(金馹孫) 권오복(權五福) 등과 함께 사형을 받았다. 형장에 나갈 때 안색이 조금도 변하지 않고 스스로 절명의 노래를 짓고 죽으니, 그 때 28세였다. 윤필상은 그래도 원한이 풀리지 않자 갑자사화 때 공을 다시 부관참시하였다. 공이 죽을 때 1세 되던 아들 세장(世璋)은 후에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관찰사에 이르렀다. 공은 뒤에 신원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는 `정간(貞簡)'이라 하였다. 공이 공주에 귀양갔던 인연으로 공주 인사들이 충현서원(忠賢書院)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 저서에 <이평사집(李評事集)>이 있다.

 

 

이목(李穆) 字는 仲雍 호(號) 한재(寒齋) 본관은 全州

李評事集(奎4748), 李穆(朝鮮)著.

          2卷 1冊(87張) 木板本 30.7×20cm.

          四周雙邊 半郭:20×15.4cm.

          有界 10行 17字 注雙行.

          版心:上下花紋魚尾.

     李穆(1471∼1498)의 시문집으로 曾孫 久澄이 1632년(仁祖 10) 初刊本을 다시  보완해서 重刊했다. 寒齋 李穆의 字는 仲雍, 본관은 全州, 開國功臣 伯由의  후손.  金宗直의 門人. 19세로 進士試에 합격, 成均館 儒生이 되었으며 이 때 王大妃가  성균관에  淫祠를 설치하고 무당을 부르자 이를 쫏아냈다. 또한 儒生을 이끌고  尹弼商을  탄핵하다가 公州에 付處되었다. 뒤에 풀려 나와 1495년(燕山君 1) 增廣文科에 장원 賜暇讀書를  했다. 典籍으로 宗學司誨를 겸하고 이어 永安道評事가 되었다. 1498년 戊午史禍 때  尹弼商의 모함을 받고 金馹孫·權五福 등과 함께 사형되었다. 甲子士禍 때  다시  剖棺斬屍 되었다가 뒤에 伸寃되어 吏曹判書에 追贈되고 公州의 忠賢書院에  祭享되었다.  諡號는 貞簡. {卷1}:賦 9수(弘文館賦幷序, 女戎賦, 虛室生白賦幷序,  茶賦幷序,  七寶亭賞蓮辭등), 詩 40수(五言絶句 2, 七言絶句 10, 五言律 12, 七言律 9, 七言古風 7).  {卷2}:對策 3편, 記 1편(續唐明皇遊月宮記), 解 1편(象耕  島耘解),  祭文  1편(祭尹政丞壕文),  頌 1편(鳳鳴朝陽頌). 附錄으로 金馹孫의 感舊遊賦後序, 權五福의  贈李進士穆,  李仲의 挽舍兄重遭奇禍改폄, 柳子光傳, 戊午史禍事蹟, 戊午黨籍, 行狀,  補遺  등이  수록되어 있다. 1631년 李久澄이 쓴 跋文이 있다. 對策 3편 가운데 제1은 최근에 風雨가  不齊하고 水旱이 相仍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느냐는 것이며 제2는  국가의 治亂興亡이 人事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天數에 예정되어 있는 것인지를  논하라는 것이다. 제3은 人才는 국가의 利器로서 帝王의 致治에는 得人이 先務이라는 점에  비추어 네가지 人材에 관해 논하라는 것에 대해 李穆의 답안이 모두 첨부되어  있다.  「戊午史禍事蹟」에는 戊午史禍의 顚末과 관련자들의 처벌내용 등이 들어  있다.  「戊午黨籍」에는 金宗直, 金馹孫, 權五福, 權景裕, 李穆, 許磐, 姜謙, 表沿沫, 洪瀚,  鄭汝昌, 茂豊副正摠, 姜景敍, 李守恭, 鄭希良, 鄭承祖, 李宗準, 崔부, 李원, 李胄, 金宏弼,  朴漢柱, 任熙載, 李繼孟, 姜渾 등의 人的事項, 학문 계통, 처형 종류 등이  수록되어  있다. 戊午史禍에 관계되는 측면자료들이 있다.

 

 

<국조 문과 방목>

이목(李穆)   

       연산군(燕山君)1년(1495년), 별시(別試) 갑과1(甲科1)  

  

>>> 인적사항

  생년(生年)  1471년, 신묘

  자(字)   중옹(仲雍)

  호(號)    

  본관(本貫)   전주(全州)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정간(貞簡)

>>> 가족사항

  부(父)   이윤생(李閏生)

  생부(生父)    

  조부(祖父)   이손약(李孫若)

  증조부(曾祖父)   이속(李粟)

  외조부(外祖父)   홍맹부(洪孟阜)

  처부(妻父)   김수손(金首孫)

  형(兄)   이수(李<수0x675F>)

  자(子)   이세장(李世璋)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1489(기유) 생원시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생원(生員)

  품계(品階)    

  관직(官職)   호당&(湖堂&), 평사&(評事&)

묘(墓)

 

부(父)

이윤생(李閏生)  부사과(副司果)

모(母)

남양홍씨(南陽洪氏)  직장(直長) 홍맹부(洪孟阜)의 女

형제(兄弟)

형(兄) 이수(李수)  참찬(參贊)

배(配)

예안김씨(禮安金氏)  대사성(大司成) 김수손(金首孫)의 女

김수손(金首孫)

자는 사윤(士允). 1456년(세조 1)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거쳐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역임했고,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찬진(撰進)했으며, 후에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국조 문과 방목>

김수손(金首孫)   

       세조(世祖)2년(1456년), 식년시(式年試) 정과4(丁科4)  

>>> 인적사항

  생년(生年)   

  자(字)   자윤(子允)

  호(號)    

  본관(本貫)   예안(禮安)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 가족사항

  부(父)   김신(金新)

  생부(生父)    

  조부(祖父)   김숙량(金淑良)

  증조부(曾祖父)   김로(金輅)

  외조부(外祖父)   최거(崔<거0x5458>)

  처부(妻父)   공기(孔<기0x59AC>)

  손(孫)   김반천(金半千)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특별시(特別試)   병신1476(丙申1476)

  전력(前歷)   생원(生員)

  품계(品階)    

  관직(官職)   형조/참판&(刑曹/參判&)

 

김수손(金首孫)   

       성종(成宗)7년(1476년), 중시(重試) 3(3)  

>>> 인적사항

  생년(生年)   

  자(字)    

  호(號)    

  본관(本貫)   미상(未詳)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 가족사항

  부(父)    

  생부(生父)    

  조부(祖父)    

  증조부(曾祖父)    

  외조부(外祖父)    

  처부(妻父)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특별시(特別試)   병자1456식년시방$(丙子1456式年試榜$)

  전력(前歷)   행경력(行經歷)

  품계(品階)    

  관직(官職)    

자(子)

이세장(李世璋)  관찰사(觀察使)

1497(연산군 3)∼1562(명종17)

조선의 문신. 자는 도성(道盛), 호는 금강(錦江)·漁첤(어수), 評事(평사) 穆(목)의 아들. 1516년(중종11) 進士(진사)가 되고, 1534년(중종29) 式年文科(식년문과)에 丙科(병과)로 급제, 正字(정자)·持平(지평)·校理(교리)·掌令(장령) 등을 지냈다.1541년 큰 흉년이 들자 지방관들의 구제사업을 督察(독찰)하기 위해 함경도 암행어사로 나갔고, 이듬해 執義(집의)·副應敎(부응교)·侍講官(시강관)·典翰(전한) 등을 역임, 1545년(명종 1) 舍人(사인)에서 直提學(직제학)에 승진, 「中宗實錄(중종실록)」 編修官(편수관)을 겸했다. 1549년 同副承旨(동부승지)를 거쳐 右承旨(우승지)가 되고, 이후 禮曹 參議(예조참의)·都承旨(도승지)·戶曹 參議(호조참의)를 거쳐 1552년 강원도 관찰사가 되고, 1544년 黃州 牧使(황주목사)로 좌천되었으나 兩司(양사)의 상소로 다시 호조 참의가 되었으며, 1557년 호분위 대호군에 보직되었다. 명종 때 淸白吏(청백리)에 錄選(녹선)되었다. 

 

<국조 문과 방목>

이세장(李世璋) More Info.

       중종(中宗)29년(1534년), 식년시(式年試) 병과4(丙科4)  

>>> 인적사항

  생년(生年)  1497년, 정사

  자(字)   도성(道盛)

  호(號)   금강(錦江)

  본관(本貫)   전주(全州)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청백리(淸白吏)

>>> 가족사항

  부(父)   이목(李穆)

  생부(生父)    

  조부(祖父)   이윤생(李潤生)

  증조부(曾祖父)   이손약(李孫若)

  외조부(外祖父)   김수손(金首孫)

  처부(妻父)   양공숙(梁公淑)

  자(子)   이철(李鐵)

  손(孫)   이윤호(李允濠)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1516(병자) 진사시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진사(進士)

  품계(品階)    

  관직(官職)   지신사$(知申事$), 옥당&(玉堂&)

녀(女)

 

형제(兄弟)

제(弟) 이진(李진)

문헌(文獻)

1. 사원일람<祠院一覽> 辛鍾友 著

이목(李穆)

# 충청도(忠淸道)  공주(公州)

*충현서원(忠賢書院)

선조신사건 인조을축액(宣祖辛巳建 仁祖乙丑額).

제향. 주 자(호회암 시문휘국공 문묘배향). 이존오(호석탄 고려 우정언 본경주). 이 목(영안도평사 증이판 시정간 본전주). 성제원(호동주 보은현감 본창녕). 조 헌(호중봉 증영의정 시문열 문묘배향 본배천). 김장생(호사계 일천참봉 가선대부 시문원 문묘배향 본광산). 송준길(호동춘당 좌참찬 증영의정 시문정 문묘배향 본은진). 송시열(호우암 좌의정 시문정 효종묘 문묘배향 본은진),

祭享. 朱 子(號晦庵 諡文徽國公 文廟配享). 李存吾(號石灘 高麗 右正言 本慶州). 李 穆(永安道評事 贈吏判 諡貞簡 本全州). 成悌元(號東洲 報恩縣監 本昌寧). 趙 憲(號重峯 贈領議政 諡文烈 文廟配享 本白川). 金長生(號沙溪 逸薦參奉 嘉善大夫 諡文元 文廟配享 本光山). 宋浚吉(號同春堂 左參贊 贈領議政 諡文正 文廟配享 本恩津). 宋時烈(號尤庵 左議政 諡文正 孝宗廟 文廟配享 本恩津),

*별사(別祠)

효종경인건(孝宗庚寅建).

제향. 서 기(호고청 증지평 시문목 본이천).

祭享. 徐 起(號孤靑 贈持平 諡文穆 本利川).

문헌(文獻)

이평사집 ( 李評事集 )  

형태서지 | 저 자 | 가계도 | 행 력 | 편찬 및 간행 | 구성과 내용

  형태서지

권수제  李評事集

판심제  李評事集

간종  목판본

간행년  1631年刊

권책  本集 2권촵附錄 합 1책

행자  10행 17자

규격  20×15.4(㎝)

어미  上下二葉花紋魚尾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도서번호  奎4748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18

 

 저자

성명  이목(李穆)

생년  1471년(성종 2)  몰년  1498년(연산군 4)

자  仲雍  호  寒齋

본관  전주(全州)  시호  貞簡

 

 가계도

조부(祖父) 이손약(李孫若)  고성군사(高城郡事)

부(父) 이윤생(李閏生)  부사과(副司果)

모(母) 남양홍씨(南陽洪氏)  직장(直長) 홍맹부(洪孟阜)의 女

형(兄) 이수(李수)  참찬(參贊)

본(本) 이목(李穆)

배(配) 김씨(金氏)  대사성(大司成) 김수손(金首孫)의 女

자(子) 이세장(李世璋)  관찰사(觀察使)

제(弟) 이진(李진)

 

기사전거 : 墓表陰記(金尙憲 撰) 및 萬姓大同譜에 의함

 행력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성종 2 1471 신묘 成化 7 1 태어나다.

성종 15 1484 갑진 成化 20 14 金宗直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성종 20 1489 기유 弘治 2 19 進士試에 합격하다.

~ ~ ~ ~ ~ ~ ~ 왕대비가 성균관에 淫祠를 설치하여 무당을 부르자 이를 쫓아내다.○ 闢佛疏를 올리고, 尹弼商을 탄핵한 일로 公州에 유배되다.

연산군 1 1495 을묘 弘治 8 25 겨울, 문과에 장원하다.

연산군 2 1496 병진 弘治 9 26 성균관 전적이 되어 宗學司誨를 겸하다. ○ 賜暇讀書하다.

~ ~ ~ ~ ~ ~ ~ 永安南道評事가 되다.

연산군 4 1498 무오 弘治 11 28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斬刑을 당하다.

연산군 10 1504 갑자 弘治 17 -  갑자사화로 剖棺斬屍되다.

중종 2 1507 정묘 正德 2 -  5월, 復官되다.

선조 14 1581 신사 萬曆 9 -  公州 忠賢書院에 享祀되다.

선조 18 1585 을유 萬曆 18 -  손자 李鐵이 茂松에서 문집을 초간하다.

인조 9 1631 신미 崇禎 4 -  증손 李久澄이 靑松에서 문집을 중간하다.

숙종 44 1718 무술 康熙 57 -  ‘貞簡’(不隱無屈曰貞 正直無邪曰簡)으로 贈諡되다.

-  -  1914 갑인 -  -  -  후손 李存洙가 문집을 증보하여 간행하다.

 

기사전거 : 墓表(金尙憲 撰), 成宗實錄, 燕山君日記에 의함

 편찬 및 간행

저자의 遺文은 무오사화로 인해 대부분 산실되었는데, 아들 李世璋이 남아 있던 시문을 수집촵편차하고 손자인 李鐵이 1585년 茂松宰로 부임하여 이를 간행하였다.《초간본》 현재 이 초간본은 전하지 않는다.

그 후 임진왜란으로 板木이 유실되고 傳本 또한 귀하게 되자 증손 李久澄이 다시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고, 墓表와 補遺를 添入하여 1책으로 精寫한 후, 이것을 靑松宰로 있던 1631년에 「李評事集」으로 題名하여 2권 1책의 목판으로 중간하였다.《중간본》 현재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근래에는 후손 李存洙촵李膺浩 등이 중간본에 일부를 증보하여 「寒齋集」으로 改題하고, 1914년 4권 2책의 목활자본으로 중간하였다.《삼간본》 현재 성균관대학교 중앙도서관, 성암고서 박물관,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국립중앙도서관과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는 原集 2권 1책이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1631년 靑松에서 간행된 중간본으로 서울대학교 규장각장본이다.

 

 구성과 내용

본 문집은 詩촵文촵附錄 합 2권 1책으로 되어 있다.

권1에는 詩가 실려 있으며, 賦촵辭촵오언절구촵칠언절구촵오언율촵칠언율촵칠언고풍 등 시체별로 분류하여 편차하였다. 이 중 七言古風의 〈遊龍門釜潭巖歌〉에는 저자의 自註가 있으며, 〈贈別洪?國隨相公謁先陵咸昌一首〉는 중간시에 새로이 增補한 것이다.

권2에는 1495년 문과장원 시에 지은 殿策을 비롯하여 3편의 策問과 記촵解촵祭文촵頌이 각각 1편씩 실려 있다.

附錄에는 金馹孫의 〈感舊遊賦後序〉, 權五福의 贈詩, 李?의 挽詩에 이어 南袞이 지은 〈柳子光傳〉과 「睡軒集」에서 발췌한 〈戊午史禍事蹟〉촵〈戊午黨籍〉을 싣고, 金尙憲이 지은 〈墓表陰記〉와 〈補遺〉를 添錄하였다.

권미에는 1631년에 쓴 증손 李久澄의 跋이 실려 있다.

필자 : 李美實

기타(其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