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물 제목 | 전라도 세탁 홍어에 친일파 김용주 첩의 자식 김무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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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 | 명예훼손/기타권리 침해 (게시물에 포함된 내용으로 피해를 주장하는 당사자로부터 게시중단 요청 접수) |
요청자 | 김무성 |
일자 | 2015.07.16. |
그리고 김무성 할아버지는
종편패널들이 확인해준거다.
게시물 제목 | 전라도 세탁 홍어에 친일파 김용주 첩의 자식 김무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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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 | 명예훼손/기타권리 침해 (게시물에 포함된 내용으로 피해를 주장하는 당사자로부터 게시중단 요청 접수) |
요청자 | 김무성 |
일자 | 2015.07.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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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광주사태 남파되었던 북한 대남연락소... 증언(요약) |
5.18광주사태 당시 '복면부대'의 실체? '복면부대'의 실체는 남파된 북한군특전사들이였다. 북한 대남연락소 임무를 받고 남파 었던 간첩 '손성모' * 1980년대초 남파되어 잠복중이 던 '손성모'는 5.18광주사태 당시 남파되었던 북한군 특전사의 길 안내자로 활약하였다. 1981년 경상북도 문경시에서 체포되어 1999년 까지 수감되어 있다가 김대중정부의 특사로 석방되었고 2000년 '6.15남북공동성명'이후 비전향장기수로 다른 장기수들과 함께 북한으로 송환되었다. 1980년 5월 광주 사태현장에 파견 되였던 전 북한 조선노동당 중앙당 연락소 전투원의 증언 (요약)
◆ 5.18광주사태 참가자인 김명국(가명) 이 증언하는 북한조선인민군 부대의 명칭과 사건 연월일, 참가자 이름 등은 모두 사실임
다만 본인의 요구에 따라 당사자의 이름은 가명으로 밝힘 이름 : 김명국 (가명) ◆“고등중학교16살 때 1977년 8월26일 날 평양시 순안구역 구서리 중앙당 대남 연락소에 입대. 명칭은 112훈련소(아동훈련소)
◆1년 넘게 훈련을 받다가 평양시 서포구역 대양리에 있는 조선 노동당 중앙당 연락소(일명 대남 연락소) 2처 전투정찰에 배치
◆“ 1980년 5월 19일 날 야외 훈련 하였는데 상급 명령으로 철수 그날 오후 4시 경에 대양리 에서 50명의 전투인원이 북한에서 만든 갱생지프차로 출발 저녁9시 황해남도 장연군 장산곶 북한대남연락소 기지에서 경에 배를 타고 출발 ◆ '270명이 남파되었다가 거의 다 죽고 살아 돌아 온 사람이 70명 정도 밖에 안 된다고 파견대장 문제심 발언 하였다'고 증언 파견대 대장 : 북한 중앙당 대남 연락소 소장
◆“아니야, 우리 떠날 때는 대장이랑 함께 50명이 떠나고 나머지 사람들은 우리 보다 먼저 떠난 것 같아." 증언자의 조는 12명 "직속부대에는 3개조가 있었는데 증언자조가 12명이고 3조는 15명, 나머지 사람들은 16정찰에서 배속된 남한 전문가 들이였다.”고 증언 배 길이가 20m / 외형 : 일반 고기잡이 배 / 내부 설계 : 추진기가 4개 달린 배 “우리가 탓 던 배는 일반 남한의 고기 배와 꼭 같아. 길이가 20m쯤 되였을 거야. 여느 때는 일반 배처럼 고기잡이를 하는데 추진기가 4개 달린 배야. 상황이 발생하면 추진기 4개가 다 가동하는데 비행기처럼 속도가 빠르고 자체 폭파하게 되여 있어. 남쪽의 길 안내자 사람 몇 명이 대장한테 와서 자기들이 남한에서 이룩한 성과 부분을 보고... 그들의 파견대장 '문제심'에게 보고내용은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였다는 것과 함께 트럭, 장갑.차들을 노획하였다."는 내용이였다. 23일부터 파견대장 '문제심'은 3일동안 광주시 도심에 있는 봉기군 지휘부에서 남파된 북한군 특전사부대 지휘하였음
◆1980년5월27일 새벽 북한으로 철수 시작 아침 6시경 철수 중 산 중턱에서 국군 특전사들과 전투중 3명 사살
◆5월30일 날 새벽에 증언자의 일행이 ‘문경고개’ 근처에서 행군 할 때 부조장이 여자애에게 발각되자 죽여 땅에 묻어 버렸다고 증언
◆6월4일 휴전선에 도착한때가 저녁11시경 휴전선 지뢰밭과 철조망은 정찰국 성원들이 앞서나가면서 해제 휴전선을 넘어서 보니 6월5일 아침9시 경이였는데 지역을 알아보니 북한 강원도 판교군 지하리 북한군 포사격장에 들어갔다 포탄에 맞아 2명 즉사 본인은 다리에 부상
◆광주봉기의 북한군 침투 총화는 6월 15일 김일성과 김정일의 직접적인 참석 하에 평양에서 하였음 남한에 침투 되였다 귀하한 군인, 전사한 군인 모두 에게는 공화국영웅 칭호가 수여 분견대 대장 2명은 조선인민군 교도지도국(특수전 사령부)작전부에 승급 배치 김일성은 소좌급인 분견대장들에게는 대좌의 군사칭호를 수여 하였음 조장들은 7명이 살아 돌아 왔는데 각 군단부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상위 급 군사칭호를 상좌로 승격시켜 배속하였음
◆조선인민군 1010군부대 전투원 김명국은 1980년5월 전투공로로 하여 조선로동당에 입당하였음 같은 전투공로로 하여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국기훈장1급, 자기 목숨을 바쳐 지휘관을 보위한 공로로 국기훈장1급 수여받았음(국기훈장 2개면 공화국영웅칭호와 맞먹는 대우) 태천군관학교(북한군 특수전 사령부 군관학교) 에 입학 2003년까지 북한군 특수전 부대에서 지휘관으로 복무 마지막 남는 사람은 붙잡히게 되면 자폭하게 되여 있어. 만약 전우가 부상당해 대오의 행군에 지장을 준다고 생각되면 죽여서 땅에 묻어 묻어버림 옷 속에 여러 가지 유형의 작은 물체를 항상 가지고 다니는데 고성능 폭약 3킬로 그람이 터지는 위력과 맞먹는다.'고 증언 '광주 사태가 진압되면서 우리 부대는 모두 갈라졌는데 혹시 남한의 산속이나 도시속에 숨어 있다가 훗날 북으로 들어오지 않았나 생각한다. 2006년 탈북 2006년 대한민국에 입국 현재 서울 수도권 일대에서 살고 있음 시민군으로 가장한 북한특전사는 국군에게 총질을 하였고 국군으로 가장한 북한특전사는 시민군에게 총격을 가하여 서로가 사상자를 발생시켜 서로의 감정을 폭팔시키는 이간책동을 하였다.
김대중 정부시절 비전향장기수 북송
거의 모두가 30년~40년의 옥고를 치룬 사람들 가운데 유독 단 한사람만은 17년이라는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손성모 남자 당시나이 67세 학력관계 김일성종합대학 졸업생. 거의 대부분의 비전향장기수들은 한국전쟁시기 남한에서 전투하다가 체포된 사람들인데 손성모는 달랐다. 나이로 보나 학력으로 보나 도무지 한국전쟁참가자가 될 수 없었다. 전국적으로 간부학습반에서 손성모의 투쟁업적에 대해 2003년 북한 당 기관지 ‘노동신문’ 2면에 ‘ 나는 김일성 종합대학 졸업생이다.’라는 제목을 달고 글이 실린 적이 있다. 내용 : 조국의 통일과 독립을 위해 1980년 광주봉기때 북에서 파견되어 적구에서 싸우던 중 변절자의 밀고로 여기 저기 __기다가 산속에서 몇 달 동안 숨어서 활동하다 놈들에게 체포되게 되자 당과 수령 조국과 인민을 위해 목숨 바칠 비장한 결심을 하고 칼로 목의 대동맥을 끊어 자살을 시도했으나 공교롭게도 죽음이 쉽게 이루어 지지 않자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을 버리지 않고 “비 전향 장기수”로 17년간을 감옥에서 투쟁했다고 씌어 있다. 당, 법 간부학습반에서 ‘손성모동지의 투쟁업적을 따라 배우자!’라는 주제의 내용으로 문답식 학습경연과 궐기모임까지 진행되었다.
[편집] 생애 전라북도 부안군 출생이다. 가난한 가정의 막내로 태어난데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면서 교육 기회를 제대로 제공받지 못했다. 일찍부터 머슴살이를 하는 등 노동자로 일하면서 고학을 하여 서울대학교에 입학하였다.
1950년에 한국 전쟁이 발발했을 때 서울대학교 학생으로 재학 중이었다. 개전 사흘만인 6월 28일에조선인민군
1980년대 초반에 전라남도 해안을 통해 공작원으로 남파된 뒤 승려로 위장하여 활동하다가, 1981년 ! 2월에 경상북도 문경시에서 체포되었다. 간첩 수사 기관에서 장기간 조사를 받았으며, 1987년 6월 항쟁 성공 후에야 정식으 로 구속 퓸駭
[1] 손성모는 법정에서 간첩 혐의를 부인하고 통일사업을 위해 내려온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후 전향을 거부함으로써 비전향 장기수가 되었다. 총 수감 기간은 만 19년이 조금 못 되어, 비전향 장기수 가운데서는 비교적 짧은 편이다. 수감 생활 후반기에는 신광수와 함께 최후의 비전향 장기수 2인으로 알려져 인권단체가 석방 운동을 벌였고
[2], 1999년 연말에 김대중 정부의 특사로 광주교도소에서 가석방되었다. [3][4] 출옥 후에는 서울 관악구에서 다른 출소 장기수들과 함께 공동 생활을 하였다.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에 의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송환되고 조국통일상을 수여받았다. 송환 후 S! PAN>에 정착하여 2004년 〈화선 당세포〉라는 시를 발표[5]하는 등 조선작가동맹 소속시인 으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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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도가 시민검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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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비의 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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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isoo 선생님~사랑합니돠~*^^*♥술이좋은요즘입니돠~ㅍㅎㅎㅎ
"ㅋㅋㅋ입에 걸레를 물고 사시는군요@lbk1030: @limsky02 @oisoo 왼수(외)는 뽕이나 대마초를 더 좋아혀~ 멍청아!"
@lbk1030 Hey man!are you crazy?! Then you have to go a mental institution.Got it!! Try it right now!!Fucy you!!!
(I am english kam kam anytime Korean or Japanese only ^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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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같은 쌩쥐들에게 딱 어울리는 말)
혹세무민(惑世誣民)=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미혹하게 하여 속임
후안무치(厚顔無恥)=뻔뻔스러워 부끄러움이 없음
인면수심(人面獸心)=사람의 얼굴을 하였으나 마음은 짐승과 같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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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은 높아졌지만 상식은 부족하고
지식은 많아졌지만 판단력은 모자란다.
돈버는 법은 배웠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는 잊어버렸고
인생을 사는 시간은 늘어났지만 시간 속에 삶의 의미를 넣는 법은 상실했다.
- 제프 딕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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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 번역
니혼고노트라우마데모아루노?코이츠 니혼고데 카이테 아루토 이죠오니 신케이시츠다요네.
(일본어 트라우마라도 있는거냐? 이 지지베 일어로 써져있으면 이상할 정도로 신경질적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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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어법이 얼마나 대단한법이길래 조금이라도 홍어들 심기만 건드렸다하면 무조건 홍어법 적용해서 강제 삭제를 하고 그것도 모잘라
페이스북(원숭이한테 시비 걸다가 3군데) 폐쇄
트윗(원숭이,쥐원이 무생이등등 홍어들에게 시비 걸었다고 2군데 계정 정지)
그것도 모잘라 홍어들 심기를 거스르는 글들을 자주 올린다고 좌음,좌이버 블로그계정 차단에
이젠 MSN 홈페이지의 댓글 달기까지 차단 당하니 도대체 홍어새끼들이 안 퍼져 있는곳이 어디란 말이냐?
온통 홍어 세상이 되어간다!
모든곳에서 홍어들을 잡아내어 몰살 시키지 않는 한 통일 대한민국의 평화는 쉽사리 오지 못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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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 제목 | 발정난 암컷 쌩쥐의 발악!(임수경아~ 어쩌냐 다 캡쳐 해놓고 니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는데ㅋ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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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 | 명예훼손/기타권리 침해 (게시물에 포함된 내용으로 피해를 주장하는 당사자로부터 게시중단 요청 접수) |
요청자 | 임수경 |
일자 | 2015.04.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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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듬어 홍어당
에이리언
북한 성접대
수경이란 홍어년이 일상에서 입에 담았다하면 태반이 Sex 관련된 막말을 하는것같다.
(뭐 평소 일상이든,정치든 주둥이가 개걸레보다 더럽쥐만....)
아마도 이것은 평소 욕구불만에서 나오는 불만의 표출인데 이건 아마도 이북서 받았던 성접대 상대의 테크닠이 남한서 상대한 남자들보다 월등히 뛰어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렇다고 이북을 마음대로 가서 Sex를 할수도 없는것이니 날이 갈수록 불만만 생기다보니 히스테리만 늘어 가는것같다..
역으로 생각하면 수경이 주변 운동권 홍어놈들의 정력이 소리만 꽥꽥 지를줄 알쥐 형편 없으리란 반증이기도하다.
윤기권(尹-, 1962년 1월 16일 ~ )은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가이자 화가이며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자이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광주대동고등학교에 재학중 고등학교 2학년의 신분으로 시민군의 대열에 참가했다.
그러나 1991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보상금 수령후 자진해서 제3국을 경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월북,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평양시 교수강습소 및 학생답사견학소 지도교원을 역임하였다. 전라북도 출신.
당시 시민대장급인 대표 4빨갱이 윤기권, 김대중, 문익환, 서경원
참고 - 영화 화려한휴가에서 안성기역의 실제인물.
그외 518폭동당시 미스터리한 일들
1. 518 최초 사망자가 전경 4명이었떤 이유(폭동분자들이 버스로 밀어버림)
2. 순식간에 유언비어가 퍼지며 무기고 7개를 동시 습격한 사실
3. 폭동분자들 탱크 몰고 민간인들을 잡아 다가 투항시킨 사실
4. 교도소 죄수들을 풀어준 사실
5. 방송국을 불지른 사실
6. 방송국 지하에 tnt 설치와 도청 장치 설치한 사실
7. 어린 청년들까지 폭동에 동원한 사실
8. 매년 북괴 들이 518 기념을 하는 사실
9. 김일성이가 5.18때 남하하지 못한걸 후회했던 사실
10. 윤기권 같은 색희가 돈 챙겨먹고 월북한 사실
11. 518 폭동관련 사망자 부상자 조사 결과 폭동군들이 사용했던 칼빈과 m1에 의한 민간 사상자가 더많은 사실
결론 5.18은 폭동이었다.
대의명분이 부족하고 그들의 협상제안은 김대중 석방과 정치탄압에 대한 요구를 했었음.
또한 광주폭동과 관련된 인물 중(시민대장급)에 월북안한 사람이 없었다.
대표적으로 김근태는 전가족 월북했고, 윤기권(화려한 휴가 안성기역)은 91년 광주폭동 보상금가지고 북으로 먹튀.
게시물 제목 | (정보) 518에 북한군이 개입되었다는 증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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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청기관 | 방송통신심의위원회 |
요청사유 | 사회질서위반(해당 정보는 ?정보통신에 관한 심의규정? 제6조제5호, 제8조제3호바목 등에 위반되는 내용이 게시되어 있음.) |
요청 일자 | 2015.03.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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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토박이 김영택 기자가 보기에도 복면 쓴 무장단체는 정체가 수상하였다. 그가 "이들의 정체에 의심이 들었다"고 말했을 때 그 의미는 시민군 복면부대는 광주사람들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러면 그들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김영택 기자는 5월 22일 오후에 비로서 처음으로 복면 괴한들을 보았다. 그러나 푸른눈의 목격자 힌츠페터의 영상물은 5월 20일 오후에 이미 복면괴한들이 광주로 침투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아래 캡쳐 사진은 위 영상의 한 장면이다. 5월 20일 오후 목포에서 온 김대중 계열 별동대 차량 행렬이 다리 위를 달리며 광주로 진입하는 순간 가로등 옆에서 복면괴한이 목포 별동대를 환영하며 행선지를 안내하는 광경이 힌츠페터의 영상 카메라에 그대로 포착되었다. 시민군 중에 별동대가 있었는가? 김영택 기자는 그렇다고 말한다. 위 청문회 동영상에서 김영택 기자가 "5월 22일에는 서울에서 왔다는 대학생 300 여명이 시위에 합류하였으며"라고 말할 때 그 말은 시민군 실은 수 백 명이 광주시민들이 아니라 외지인 별동대였다는 말이다.
위 두 장의 사진에서 다리 위 가로등 옆 복면괴한이 왼 손으로 카빈소총을 옆으로 눕혀서 든 채로 오른손으로는 손짓을 하면서 군용트럭 위의 무장괴한들과 의사소통을 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에 트럭 위의 무장괴한들이 총을 위로 높이 치켜세우며 환호하는 모습이 보인다. 트럭 위의 무장괴한들은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르고 있는데, 이것은 비표의 구실을 하였으며 언제든 복면으로 활용될 수 있는 수건이었다. 조수석에서 상반신을 밖으로 내밀고 있는 괴한은 이미 복면을 한 모습이 눈에 띈다. 김영택 기자가 5월 22일부터 본 복면괴한들이 바로 이 자들이었다.
위 사진에서 "김대중 선생 만세"라고 씌어진 현수막을 건 청색 트럭 적재함에 올라탄 괴한들도 한결같이 머리에 수건을 동여매고 있으며, 운전석과 조수석의 괴한들은 이미 복면을 쓰고 있다. 목포 김대중 계열 별동대 5월 20일 광주 침투를 클릭하면 5월 20일 김대중 계열 별동대 조직, "김대중 선생 만세"를 외치는 세력 100여명이 광주로 올라온 사실을 기록한 문건이 있다. 아래 사진에서 머리에 수건을 두른 남자가 군용트럭을 타고 뒤에 따라오는 무장세력에게 손짓으로 신호하고 있다. 주로 주동자들이 복면을 하였으며, 한국 기자들이 없는 곳에서는 머리에 수건을 두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정체를 숨기는 효과가 있었다. 또 머리에 두른 수건은 무장세력 조장들의 비표 혹은 계급장 구실을 하였다. 머리에 수건을 두른 자들이 시민군 작전 지휘를 하였다.
아래 동영상을 보면 이들이 바로 다음 날 21일 정오 무렵 금남로4거리 등에서 무기와 실탄을 분배한 자들이었다. 이 동영상에서 보듯이 머리에 흰수건을 두른 자들이 21일 오전 무장시민군을 금남로로 집결시키며 전남도청 공격 작전을 지휘하였다.
5월 21일 오전 광주 금남로 인근에서 무기와 실탄을 분배한 자도 머리에 두른 백색수건으로 비표를 한 자요,
시민군 장갑차 작전을 지휘한 자 역시 머리에 두른 백색수건으로 비표를 한 자였다. 이렇듯 20일 오후 목포에서 온 별동대가 21일 오전에 광주를 무장폭동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목포에서 온 별동대가 전원 목포 깡패 조직이었을까? 아래 사진에서 철모에 백색수건으로 비표를 한 시민군이 장갑차에 기관총을 거치해 놓고 대형 무전기를 휴대하고 있다. 이 시민군은 전투병과 통신병의 역할 등을 동시에 수행하는 특수부대원급 시민군이다. 조폭이 장갑차와 기관총과 통신장비 등을 저렇게 능숙하게 다룰 수 있을까? 아마도 별동대 속에는 도시게릴라 특수전 임무를 수행하는 특수부대원급의 제3의 조직이 끼어있었다는 견해가 저 무장폭도가 광주시민이라는 주장보다는 훨씬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김영택 기자는 5월 21일 오전 8시에 낫으로 무장한 농민 50명이 광주 톨게이트 인근에 매복하고 있다가 20사단 인솔대 지프차 14대를 탈취한 사실을 기록한다. 어디서 온 농사꾼들인지는 모르겠으나 아직 운전면허 소지자가 극소수였던 시절에 모두가 능숙하게 군용 지프차를 운전하며 긴 지프차 행렬을 이루며 어디론가로 가고 있다. 그런데 지프차에 탑승한 농사꾼들이 한결같이 머리에 백색띠로 비표를 하였으며 입은 옷들이 세가지 색상의 동일 무늬 제복이다. 농촌에서 젊은 사람 구경하기 힘든 시절이라 각기 다른 마을에서 모여든 청장년들이었다면 각자의 개성에 따라 민간인의 옷은 천차만별이기 마련인데 어떻게 모든 같은 옷을 입고 있는가? 동일 비표와 동일 제복으로 보아 이들은 분명 한 조직에 속한 자들이었다. 이 농민들이 도대체 어디에 사는 누구였기에 5월 21일 이른 아침에 광주에 집결할 수 있었던 것이며,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21사 지프차들을 탈취하여 몰고 다녔던 것인지 이제 5.18 단체들도, 5.18 재판을 주도하며 전두환 전 대통령 사형을 구형하였던 채동욱 떡검도, 역사 교과서를 집필하는 자들도 우리에게 말해 주어야 한다.
위 사진에서 보면 농민들이 어느새 공수부대 군복으로 갈아입고 지프차를 몰고 다니고 있다. 첫번째 지프차에서 서있는 시민군은 잠시 목으로 내린 복면과 양쪽 귀 옆의 장발을 제외하면 누가 보아도 진짜 공수부대원으로 혼동할 만하다. 아무 민간인에게나 공수부대원 군복을 입힌다고 강인하고 날렵한 공수부대원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다. 하물며 농사꾼이 저렇게 오랜 훈련으로 단련된 공수부대원이 외모를 지닐 수 있겠는가? 그래서 20사 지프차들을 탈취한 농민들의 정체가 수상한 것이다. 여하튼, 공수부대원들에게 누명을 씌울 작정으로 공수복장을 한 시민군 숫자가 저렇게 많았다는 사실이 이 사진으로 다시금 확인되었으니 애매한 공수부대원들이 지난 33년간 썼던 누명에 대해서는 이제 재조명이 불가피하다. 공수부대원 복장의 시민군들이 지프차들에 탑승하였음을 보여주는 이 사진에서도 머리에 흰색 수건을 두른 자가 조장처럼 보인다.
저 위 칼러 사진에서 지프차를 타고 다니는 농민들이 진짜 농민이었는지의 의문을 푸는 하나의 단서가 아래 사진이다. 5.18 사기꾼들은 5월 21일 오후 한시 반 이후에 광주시민들이 무기 탈취하러 출발했다고 주장하지만 아래 두 장의 사진에서 보듯 이미 정오가 되기 전에 외지인들이 금남로 4거리 인근에서 무기 분배를 시작하고 있었다. 연한 녹색 복면을 하고 짙은 녹색 상의를 입은 이 무장폭도의 상의 무늬를 눈 여겨 관찰하면 위 지프차 행렬 칼러 사진에서 지프차틀 타고 있는 농민들의 상의에 박힌 원형 체크 무늬와 동일한 무늬가 박혀 있다. 뮬론 사복이요, 민간인 복장이다. 그러나 항상 군인들이 군복 혹은 전투복 상의를 바지 속에 넣고 혁대를 메듯이 원형 체크 무늬 상의 입은 농민들이 그런 통일된 복장을 하고 있던 것으로 보아 이들은 하나의 군사 조직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어디선가에서 탈취해 온 총과 실탄을 분배하는 데도 이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만약 뉴욕이나 런던이나 서울에서 괴무장단체가 저렇게 도심지에서 무기분배를 하고 관공서를 접수하여 해방구를 설치할 목적으로 총기 테러를 감행하려고 할 때 국가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이런 상황에서 광주에서만 그 대처 방법이 달라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될 수 있는가?
5.18사기꾼들은 광주시민들이 5월 21일 오후 한 시반 이후에 여러 도시로 무기 탈취하러 출발하였다고 거짓말하지만 위 사진은 이미 정오에 해남경찰서에서 무기 탈취가 자행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한 명의 전남대 운동권 학생을 동행시킨 것을 제외하고 나머지 폭도들은 한결같이 복면을 하였다. 사진 왼쪽에서 운동권 학생처럼 보이는 청년이 왼손에는 두 자루의 총을 들고 있고, 오른손에는 카메라처럼 보이는 물체를 들고 있다. 이 청년 뒤의 세 명의 복면폭도들이 모두 총을 소지하고 있다 (이 사실은 5월 21일 정오 해남경찰서 무기탈취 큰 사진으로 보기를 눌러 큰 사진으로 자세히 확인해 볼 수 있음). 이처럼 위 사진은 힌츠페터의 영상물과 김영택 기자의 증언에 이어 시민군이 이미 21일 정오 이전에 여러 자루의 총기들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또 하나의 증거물이다. 5월 21일 정오에 해남경찰서를 습격한 이 복면폭도들은 광주시민들이었는가 아니면 외지에서 동원된 조폭 조직이었는가? 이것은 5.18 단체들이 답변해 주어야 할 문제이다.
위 사진의 차량은 당시 춘태여상 3학년이었던 박금희 양이 5월 21일 오후3시경 시민군 총기오발 사고로 사망하기 직전 타고 다니던 시민군 군용트럭이다. 이 시민군 차에서도 인솔자는 트럭 적재함 앞쪽 중앙에 서있는 무장폭도이며 역시 머리에 백색 비표를 두르고 있다.
위 사진 속의 시민군은 동아일보 기자가 자신을 찍을 때 기자를 노려보기도 하고 아래 사진에서처럼 얼굴을 푹 숙여 얼굴이 찍히지 않게 하기도 하였다. 시민군이 군복 입고 철모를 쓰고 있으니 광주시민들 중에는 이 자를 군인으로 오인한 시민들도 꽤 있었음 직 하다. 이처럼 군복으로 위장한 이 시민군은 철모에 백색띠 비표를 두르고도 얼굴에 복면을 걸치고 있었다. 철모를 두른 비표에 쓰인 문자 "김대중씨 석방하라"는 이 자가 김대중 계열 별동대 소속이었음을 시사한다.
아래사진 속의 무장폭도는 철모를 쓰고 있지 않으나 위 사진의 철모 쓴 폭도와 동일 규격의 비표를 머리에 두르고 있으며, 백색비표에 쓰인 문자 "김대중씨 석방하라"도 동일하다. 오늘 우리가 저런 띠를 만들려 해도 인터넷에서 어떻게 저런 규격의 백색 천을 주문해야 하는지 모르며, 어떤 필기도구로 저런 글씨를 써야 하는지 잘 모른다. 저것은 볼펜으로 쓴 글씨가 아니다. 5월 21일 오전 시민군 차량들이 광주외곽으로부터 금남로로 시민들을 수송하여 왔을 때 시민들이 각자 저런 동일 규격의 백색 천과 필기도구를 준비해 왓다가 금남로 무장시위 현장에서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똑같은 문자 "김대중씨 석방하라"를 그 천에 쓰고 머리에 동여맸던 것인가? 그것이 아니었다. 동일 구호가 동일 필체로 쓰인 동일 규격의 비표를 사전에 조직적으로 준비한 조직이 있었다.
아래 사진에서 전방에 보이는 하이콜드 간판은 당시 8층건물인 관광호텔 건물 옥상에 설치된 광고탑이며 지금은 광주일보 사옥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맞은편 백색 11층 건물이 당시 전남일보 사옥이다. 이 사진에서 시민군이 전경 복장으로 위장하고 총을 들고 시민군 군용트럭을 타고 있는데, 운전석의 인솔자는 머리에 백색 수건을 두르고 있다. 인솔자가 길을 묻자 두 명의 남자가 도청분수대 방향을 가리키는 것을 보아 전남대병원이나 기독교병원 혹은 사직공원 쪽으로 가는 길을 가리키는 듯하다. 98번 트럭 위에 2개 분대 병력의 시민군이 타고 있으나 아무도 도청광장에서 도청 인근 지리를 모르고 있다. 98번 트럭에 탄 시민군 중 아무도 광주시민이 없었고, 모두 외지인들이었던 것이다. 바로 이런 점들 때문에 그 누가 보더라도 이들의 정체에 대해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5월 22일부터 전국의 기자들이 광주로 모여든 것은 21일에 민간인 무장단체가 전남도청을 함락한 전대미문의 사건 때문이었다. 신문기자들이 모여든 광주는 군인과 경찰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는 도시였다. 전 날 경찰은 모두 민간인 옷으로 갈아 입고 광주를 빠져나가 멀리 피난 갔다. 군인들 역시 모두 광주 외곽으로 철수하였다. 따라서 이제 전혀 복면을 쓸 필요가 없었을 때 오히려 복면괴한들의 숫자가 부쩍 늘어난 이유는 무장폭도들이 사진기자들의 카메라를 의식해서였다. 광주사태 희생자들 중에 카빈소총 총상을 입은 이들도 있었고 M16 총상을 입은 이들도 있었던 이유는 무장시민군이 카빈소총과 M16을 모두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래 사진에서 손에 M16 소총을 들고 지프차에 올라탄 무장폭도를 보면 5월 21일 오후에 전남대 인근 평화시장 길목 전봇대에 총을 가리고 숨어 있다가 임산부 최미애씨에게 총을 쏜 북한군 모습이 어떠하였을 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이 폭도가 눈만 남기고 복면을 하였는데, 김영택 기자가 본 목면부대의 인상착의가 이러했다.
아래 사진에서도 지프차를 탄 두 명의 무장폭도가 머리카락만 남기고 복면을 하였는데, 사회생활하는 민간인처럼 보이지 않는 두발상태만 보아도 이들의 정체가 궁금해진다.
목포에서 온 별동대가 광주에서 사납고 과격하게 무장봉기를 주동하였을 때 광주에서는 광주운동권 윤상원과 아세아자동차 직원 김영업 등 광천동 운동권 조직이 합세하였다. 따라서 복면부대가 100 퍼센트 외지인들로만 구성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광주시민들도 더러 있었을 것이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무장폭도들은 무장폭동이 떳떳치 않은 일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기에 복면을 하였다는 것이다.
위 사진 왼쪽 붉은 점퍼 무장폭도가 똑같은 수건 두 개로 복면한 것을 주목해 보자. 이 수건이 아래 사진의 세 명의 시민군이 복면으로 사용하는 수건과 동일한 수건이다. 이 세 명의 무장괴한들이 한 형제가 아니라는 것은 한 눈에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상의 역시 모두 비슷한 줄무늬이다. 이들이 모두 똑같은 수건으로 복면을 했던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5월 21일 정오에 광주시민들이 금남로로 모여 들었을 때 초여름의 화창한 봄날씨가 추울 것이 걱정되어 각자 수건을 지참해 왔는데 우연히도 모두 똑같은 수건이었던 것이었을까?
아래 사진에서 똑같은 수건으로 복면을 한 붉은점퍼 무장폭도는 5월 21일 오전 9시에 아세아자동차 공장에서 군용차량들을 탈취할 때 이미 이 수건으로 복면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수건은 그 날 정오 무렵 금남로로 모여든 시민들이 각자 지참해 온 것이 아니라, 그 날 아침 9시 이전에 어떤 조직에게 단체 지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진 왼쪽의 두 명의 무장폭도는 이미 21일 오전 9시에 언제든 연발사격할 수 있도록 탄창이 장착된 총을 소지하고 있었다. 사진 오른쪽에서 머리에 백색띠 비표를 한 자가 작전 지시를 하고 있다. 지프차 뒷칸에 서서 몸을 굽히고 있는 두 청년의 상의는 저 위 오전 8시에 20사 지프차들을 탈취하여 몰고 다니는 농사꾼들의 지프차 행렬을 보여주는 칼러 사진 속의 농사꾼들의 상의와 동일한 상의이다. 오전 8시에 20사 지프차 14대를 탈취한 조직이 오전 9시의 아세아자동차 군용차량 탈취에도 개입되어 있었다. 오전 8시와 9시 사이에 지프차를 탈취하자마자 지프차 앞에 붉은색 글씨로 "전두환 물러가라"고 쓴 현수막이 붙어 있다. 폭도들이 광목과 필기도구들을 지참하고 다녔던 것인가 아니면 미리 제작된 현수막이었는가?
붉은점퍼를 추적하기 위해 이제 탄창이 장착된 총을 들고 지프차를 타고 다니던 폭도들을 찾아보자. 아래 사진에서는 두 명의 폭도가 전경 판쵸 우의 복장으로 위장하고 언제든 연발 사격할 수 있도록 탄창이 장착된 총을 든 채로 시민군 차틀 타고 있다. 민간인에게 총을 쥐어 주어도 도저히 저렇게 각이 지고 절도 있는 군인의 폼이 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두 명의 폭도가 광주시민인지 외지인인지는 5.18측에 대답해 주어야 할 문제이다. 만약 한가지 단서가 있다면 아래 사진 오른쪽의 전경 우의를 입은 시민군이 눈 위를 가린 수건과 눈 아래를 가린 백색 마스크는 위 사진 붉은 점퍼의 것과 동일하며 탄창이 장착된 총 역시 똑같은 총이다. 붉은점퍼는 빨간색 잠바의 특징 때문에 사람들이 기억하기 쉽고 사진기자들의 카메라에 포착될 때 정체가 노출될 수 있으므로 전경 복장으로 위장하였던 것이다.
탈북자들은 광주사태에 동원된 북한군이 가발을 썼다고 증언한다. 시민군 중 가발 쓴 자가 있었다는 가정 하에 아래 사진의 빨간잠바 무장폭도를 보면 그는 한 다리 건너 윗 사진의 빨간잠바 무장폭도와 동일인물이다. 무장폭도의 코 밑으로 검정색 복면이 하나 더 추가되었지만 검정색 안에 삼색줄무늬 수건, 즉 하얀색과 분홍색과 노란색 줄무늬 수건이 있는 것이 역력히 보인다. 눈 위로 삼색 무늬 수건이 복면으로 사용된 것도 위 두 장의 사진의 인물과 동일하다. 이 세 장의 사진에서 폭도가 탄창이 장착된 총을 들고 언제든 사격할 수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 역시 동일하다. 한가지 다른 것이 아래 사진에서는 폭도의 옆머리가 유난히 길다는 것이다. 그러나 광주에서 직장생활하는 사람 중에 저렇게 옆머리가 긴 사람이 있을 수 있었는가? 남한의 직장인이라기보다는 투박한 가발을 쓴 것처럼 보이지 아니하는가?
아래 사진에서도 복면을 쓰고 거총 자세를 하고 거리를 활보하는 폭도와 주변 민간인들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 이 폭도의 제식동작은 도저히 민간인의 폼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 무장폭도 오른편에서 머리에 비표를 단 사나이가 함께 걷고 있는데, 그 두 명의 앞다리와 뒷다리의 행군제식이 정확히 일치함이 주목된다.
옆 사진의 인민군 제식걸음과 위 사진의 두 시민군 제식걸음을 비교해 보면 이 두 명의 시민군은 민간인이 아닐 뿐만 아니라, 인민군 제식걸음으로 걷고 있다. 시민군은 인민군 제식걸음으로 걸어야 한다는 규율이 있었던 것인가? 아니면 이 두 시민군은 광주시민이 아니라 외지인들이었던가? 이 역시 5.18단체들이 답변해 주어야 할 문제이다.
광주시민이 아님이 그 몸동작으로 드러나는 이 괴한들은 누구인가? 방금 전 그들이 지프차 옆에 서있었음을 보여주는 아래 사진은 이 무장폭도가 시민군 순찰조 조장급임을 시사한다.
옆 사진의 총을 멘 시민군도 경찰과 군인인 단 한 명도 없는 광주해방구에서 방독면을 복면 삼아 쓰고 있는 꼴이 외계인의 기괴한 모습을 연상시킨다. 이 시민군 뒤에 5월 하순의 화창한 초여름 날씨에 가죽점퍼를 입은 괴한이 화염병처럼 보이는 병 두 개를 들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띈다.
복면괴한들은 머리가 단정하여 경찰처럼 보이는 행인이 있으면 붙잡고 검문검색하였다. 아래는 5월 24일 단지 머리카락이 짧다는 이유로 한 행인이 복면괴한들에게 검문검색을 당하고 있는 장면.
잠시 복면을 내린 시민군 얼굴이 카메라에 포착되었다. 그런데 그의 손에 특수 장갑이 끼어 있는 것이 보인다. 5월의 초여름 날씨에 손이 시려서 낀 장갑이 아니다. 사격에 방해가 되는 장갑이 아니라 오히려 도움이 되는 장갑이요, 포복 등을 할 때 손의 피부를 보호해 줄 수 있는 장갑이요, 도시 게릴라전을 위해 다용도로 활용될 수 있는 장갑이다.
아래의 복면 시민군 사진에서 왼쪽의 한 시민군이 비슷한 종류의 특수장갑을 낀 손을 쳐든 것이 보이며, 그의 옆 폭도 역시 손에 특수장갑을 끼고 있는 것이 보인다. 이 폭도의 복면을 자세히 보면 그냥 수건을 두른 것이 아니라, 눈구멍과 입 구멍이 있는 복면이다. 명령을 전달하기 편리한 복면을 쓴 것으로 보아 지휘관으로 보이며, 시민군 옷차림인데도 장교 혹은 군관 제복처럼 보이며, 복면 위의 곱슬머리는 아무리 보아도 복면 위에 곱슬머리 가발을 올려놓은 것으로 보인다. 이 폭도들의 복면과 특수장갑들은 어디서 생겼는가? 5.18측 주장의 성립되려면 5월 21일 대낮에 광주시민들이 금남로로 모여 들었을 때 그 화창한 초여름 대낮에 너무 추울 것이 예상되어 볼이 시리지 않도록 복면을, 손가락이 시리지 않도록 특수장갑을 소지하고 모여든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위 아래의 사진들에서 이 장갑들은 전혀 손가락을 따스하게 해 주지 않는 특수장갑들이다. 이 특수장갑은 도시 게릴라전을 위한 장갑이었으며, 도시 게릴라전 혹은 무장폭도을 일으키기 위해 사전에 이런 장비들을 조직적으로 준비해 둔 조직이 있었다.
아래 사진에서 보듯 위 사진 왼편에서 특수장갑을 낀 손을 쳐들어 보이는 무장괴한의 모습이 기자의 카메라에 포착되었다. 이 자의 복면도 눈 아래를 수건으로 가린 복면이 아니라 가발이 떨어지지 않도록 가발을 동여맨 복면처럼 보인다. 복면 위로 솟아나 있는 헤어스타일이 참으로 특이하지 아니한가? 이 자의 눈매가 선량한 광주의 학생이 눈매가 아니라 예사롭지 않은 눈매이니깐 기자도 얼른 카메라에 포착하였을 것이다.
복면 무장세력이 정체를 감추기 위해 복면을 하였어도 복면이 구멍이 있는 만큼 헛점이 있기 마련이다. 위 사진에서 복면 구멍이 점점 커져 눈과 코가 드러난 한 무장괴한 면상이 기자의 카메라에 포착되었다. 복면 쓰고 광주에 침투하여 무장반란을 주도한 외지인 무장세력의 비표와 복면의 암호도 이제 드디어 서서히 풀리기 시작하고 있다. 지난 33년간 복면에 가려져 있던 5.18의 비밀이 점차 그 모습을 드러내며 밝혀지고 있는 것이다.
http://cafe.daum.net/issue21 <- 출처 역사학도
세줄요약
1. 두건을 두른새끼들은 빨갱이
2. 518의 진실이 밝혀질날이 얼마남지 않았다.
3. 김대중개새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