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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支那)의 역사는 95%가 조작된 역사 2편

2020-01-29 20:00:34 | 지나(支那)
왕조 교체기마다 수천만 인구가 격감된 이유는 무엇인가
 
지나(支那;中國)의 왕조교체기(王朝交替期)마다 수만 또는 수백만도 아닌 수천만(數千萬)의 인구가 격감한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의문을 가지고 살펴보게 된다. 이미 부분적으로는 다 살펴봤으나 지나(支那;中國)의 인구변천을 바로 봄으로써 그 나라의 문명과 문화의 척도를 알 수 있고 인간의 존엄과 생명의 존귀함을 존중한 나라였는지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말할 수 있는 인구격감(人口激減)의 원인(原因)은 첫째 국내에서는 정부군(政府軍)과 반란군(叛亂軍)의 항쟁(抗爭)에 의해서 농업노동인구(農業勞動人口)의 주역인 남자가 군대에 감으로 농지가 황폐하게 되어 기근(饑饉)에 빠지는 일이다. 혹은 작물이 메뚜기 등 해충에 의해서 작물을 먹어 없애기 때문에 식량이 점점 부족하게 된다.
 
그 외에도 장기(長期)에 걸친 가뭄과 홍수(洪水)로 인해 하천의 대홍수가 나게 되면 과학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라 대책도 없기 때문에 수 천에서 수 백만 인구가 기근(饑饉)이나 홍수(洪水)로 사망(死亡)하는 것은 결코 고대에는 드문 일이 아니었다.
 
둘째로 인구의 격감이유(激減理由)는 전란(戰亂)에 의해서 목숨을 잃은 자가 수십만(數十萬)으로부터 수백만(數百萬)에 이르는 규모가 되는 경우이다. 예컨대 서기전 5세기~서기전 3세기에 걸쳐서 많은 살육의 사실로서 ‘사기(史記)’에 기록을 남기고 있다.
 
전국시대(戰國時代) 말기 진군(秦軍)과 조군(趙軍)이 장평(長平)의 싸움에서 진군(秦軍)이 대승(大勝)을 거두자 조군(趙軍)은 40만 군인이 항복했다. 진군(秦軍)은 이때 조군(趙軍) 40만을 생매장(生埋葬)했다. 또한 진군(秦軍)을 파한 항우(項羽)는 항복한 진군(秦軍) 20만을 생매장하고 있고 최근 모택동은 문화혁명 시 수천만을 살해했다.
 
이러한 천인공노할 살육(殺戮)은 일본도 마찬가지다. 일본은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 때 731부대의 생태실험과 남경(南京)의 30만 민간인학살(民間人虐殺)을 행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전사(戰史)에서나 로마시대부터 20세기까지 유럽제국(諸國)에서는 같은 동일민족(同一民族)끼리는 결코 지나(支那;中國)나 일본(日本) 같이 수십만 대학살은 없었다.
 
한편 유럽사에 있어서 학살은 민족이 다른 경우와 종교(宗敎) 이데올로기(ideology)가 다른 경우 학살을 볼 수 있으나 지나(支那;中國)에서와 같은 대학살은 찾아 볼 수 없다. 그런데 지나(支那;中國)는 2000년 이상 자기민족의 대학살(大虐殺)을 행한 것을 볼 수 있다.
 
한편 우리도 6.25때 저지른 학살은 수적으로는 지나(支那;中國)과 일본에는 미치지 않으나 20세기 제2차 세계대전 후 1948년 세계인권선언(世界人權宣言)과 인도적(人道的)인 인권사상(人權思想)이 세계 흐름을 외면한 학살은 우리도 크게 반성할 점이다.
 
글을 맺으며
 
지나(支那;中國)의 역사를 아는 실마리로서 어찌해서 지나(支那;中國)에서는 왕조가 바뀔 때마다 수천만인이 사라지는지를 인구변천을 통해서도 볼 수가 있었다.
 
지나(支那;中國)의 역사를 연구하는 후학을 위해서 지나(支那;中國) 역대 인구의 변천을 1942년 발행된 ‘만철조사월보(滿鐵調査月報)’의 통계(統計)로 지나(支那;中國)역사를 살펴본다.
 
지나(支那;中國)의 인구 변천을 보면, 서기 2년의 전한시대(前漢時代)는 5959만 4978명에서 서기 57년에는 2100만명으로 3800만명 이상이 격감한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서기 156년 후한시대(後漢時代)에는 5006만 6856명의 인구가 서기 242년인 삼국시대(三國時代)에는 763만명으로 4000만명 이상의 대 격감(激減)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42년 후 289년 진(晋) 때는 1600만명으로 인구가 늘었는데 서기 580년 수(隨)나라 때 900만명으로 감소헸다가 서기 606년 4601만 9056명으로 증가하고 있다.
 
당(唐)나라 때인 서기 626년에 1652만명에서 서기 755년에는 5291만 9309명으로 증가했다가 서기 976년 송(宋) 때는 1800만명으로 감소되었다. 1101년 4673만 4784명으로 증가했다가 서기 1101년 남송(南宋) 때는 1923만명으로 감소하였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지나(支那;中國)가 살육하였나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 하겠다.
 
원(元)나라 때인 1264년에 1302만명이 서기 1290년에는 5887만명으로 증가했고 명(明)나라에 와서는 5987만명으로 서기 1504년에는 6010만 5853명이 되고 있다. 이 인구가 청(淸)나라 때 1063만명으로 내려왔다가 1851년 4억 3216만명으로 10년 후인 1861년에는 2억 6688만명이 1910년에 3억 4200만명이 되어 있다.
 
1929년 소위 중화민국(中華民國)이 수립 후 4억 5000만으로 증가하고 지금은 14억의 인구로 세계 최고의 인구를 갖고 있는데 이 숫자도 정확하지가 않다. 지나(支那;中國)에는 미등록의 사람들이 많기에 정확한 인구를 알 수 없다는 것이 옳은 답이다.
 
지나(支那;中國) 역대왕조(歷代王朝)에 있어서 인구(人口)의 변천(變遷)은 구왕조(舊王朝)가 멸망해서 신왕조가 성립할 때 우선 세금을 거두기 위해 바로 호구조사를 행해 전왕조가 남긴 기록보관(記錄保管) 고(庫)는 파괴하지 않고 맨 먼저 이곳을 장악한다.
 
그리고 이러한 자료로서 반드시 정사(正史)로서 기록을 남겼다. 인구의 변천에 관해서는 상당한 신뢰성(信賴性)이 있는 자료가 남겨지고 있다. 위 자료는 중화민국시대의 학자인 진장위(陳長衛)도 1932년 8월 중국사회학사(中國學社編)으로 발표한 논문 ‘중국인구문제(中國人口問題)’로부터 보족(補足)하고 있다. (以上은 杉山徹宗,「眞實の中國四千年史」58面~66面, 貝塚茂樹, ‘中國の歷史’.外 多數書冊 參照, 本文 引用 하였음.)
 

 

위에서 보듯 지나(支那;中國)의 잔혹(殘酷)한 살육(殺戮)과 인간존엄과 생명의 존엄, 인간다운 삶의 생존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21세기 오늘도 이러한 상태는 용납하지 않은 국제사회인데도 전후 인권의 보호는 국제사회전반에 관련되는 공통의 문제를 소홀히 할 수 없음에도 아직도 상존하고 있는 나라들이 있음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국회  문죄앙 탄핵 청원 (효력없는 적와대 청원이 아닌 효력있는 국회청원임 : 10만 이상시 효력 발생)

☞ ☞ ☞   https://petitions.assembly.go.kr/status/onGoing/9EB32089E7B105CBE054A0369F40E84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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