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支那)의 식인풍습,1919년 러시아수도에서 인육장사,현재도 식인?
원래 한족은 아시아의 노예잡족,
우리가 비웃어주며 멸시해도 괜찮은 하찮은 야만노예잡종족속!!!
식인문화는 지나(支那) 4천년 역사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한나라가 건국된 기원전 206년부터 청나라가 멸망한 1912년까지, 지나(支那)에서는 식인의 기록이 220차례나 정사(正史)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최초의 식인 이야기는 지나(支那)의 전설적인 왕조인 하나라 당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죠. 아들을 죽인 원수를 죽여 육장(肉醬)을 만들어 원수의 아들에게 먹기를 강요한 여인 이야기입니다. 유교는 '복수주의'를 인정할 뿐 아니라 오히려 장려한 면이 있어 복수에 의한 식인행위가 있었습니다.
한 예로, 측천무후 당시 잔혹한 고문과 형벌로 유명했던 내준신이 처형되었을 때에는, 군중들(그에게 처형당한 이들의 가족들)이 다투어 그의 고기를 잘라 먹었다고 합니다. 황제는 법률로 '살육의 형'을 규정했습니다. 이는 주나라 때의 율령 체제부터 등장 하지만 이전에도 마찬가지였죠.
식인 기록이 나타난 최초의 정사인 <사기(史記)>는 지나(支那) 최초의 역사왕조인 은 왕조(주나라 이전의 왕조)의 마지막 임금 주왕이 신하들을 '해(인체를 잘게 썰어 누룩과 소금에 절인 고기)', '포(脯, 저며서 말린 고기)', '자(炙, 구운 고기)'로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해, 포, 자'는 이후 지나(支那) 춘추전국 시대까지의 인육 조리법의 대표격으로 계속 등장합니다.
춘추시대 노나라 사람인 공자는 이 '해'를 즐겨서 해 없이는 식사를 안 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죠. 그러나 공자가 아끼던 제자 자로가 위나라의 신하로 있다가 왕위 다툼에 휘말려 살해되고, 그의 시체는 잘게 토막내어져 해로 만들어지고 말았습니다. 이 해는 사자에 의해 공자의 식탁에까지 전해집니다. 이 일 후로 공자는 그렇게 좋아하던 해를 먹지 않았습니다.
지나(支那) 역사사회에서는 생존경쟁의 패자가 승자의 먹이로 식탁에 오르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그리고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식인이 자행되기도 합니다.
춘 추전국시대의 유명한 제나라 환공은 미식가로도 유명했는데 그가 진미를 찾자 요리사인 역아(易牙)는 자기의 장남을 잡아서 삶아 바쳤습니다. 역아뿐 아니라 극한 상황에서는 자기 살을 베어내거나 아내나 자식을 잡아 주군을 대접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흔히 이런 경우는 충성으로 기려지기도 했습니다.
인육은 가끔 약용으로도 쓰였는데, 이시진의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인체 각 부위의 약효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통념에다 '효'라는 유교 사상의 실행으로서, 병으로 죽어가는 부모에게 자신의 넓적다리살 등을 잘라서 봉양하는 일은 더욱 흔했습니다. 단, 이런 일이 진정한 효행인가 하는 정치적인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당시의 황제 뜻에 따라 어떤 시대의 사람들은 '효자'로 표창을 받았고, 다른 시대 사람들은 신체를 훼손한 '불효자'로서 매를 맞은 후 귀양을 갔습니다.
수·당대에는 인육시장이 출현했고, 인육애호가가 열전(列傳)에 기록되기도 했습니다. 송 말기부터 원대에는 <철경록(輟耕錄)>이라 하여 인육 요리법을 자세히 적은 요리책까지 출판되었죠. 원나라를 방문한 마르코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자신이 목격한 복주(福州)의 식인 풍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지방에서 특별히 기록할 만한 것은 주민들이 그 어떤 불결한 것이라도 가리지 않고 먹는다는 사실이었다. 사람의 고기라도 병으로 죽은 것만 아니면 아무렇지 않게 먹는다. 횡사한 사람의 고기라면 무엇이건 즐겁고 맛있게 먹는다. 병사들은 잔인하기 짝이 없다.
그 들은 머리 앞부분을 깎고 얼굴에 파란 표식을 하고 다니면서 창칼로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인 뒤, 제일 먼저 피를 빨아먹고 그 다음 인육을 먹는다. 이들은 틈만 나면 사람들을 죽여 그 피와 고기를 먹을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지나(支那)의 식인 풍습은 <삼국지>, <수호지>, <서유기> 등 유명한 지나(支那) 고대의 소설에도 잘 나 타나 있습니다. <삼국지>의 경우, 정사로 기록된 진수의 삼국지에는 유비가 즐겨먹은 음식이 인육으로 만든 포였다고 하 며, 여포가 죽은 후 그 고기를 죄인들에게 먹였다고 합니다. 소설 <수호지>에서는 인육으로 고기만두를 만들어 파는 악 한이 등장하고, <서유기>에서는 고승(高僧)의 고기가 불로장생의 영약이라 하여 삼장법사가 끊임없이 요괴들의 공격을 받 는 장면이 나옵니다.
인육의 판매를 금지하는 법이 송나라 때에 만들어졌지만, 명나라를 거쳐 청나라 말기에 이르기까지 인육은 시장에서 공공연히 매매되었습니다. 1918년, 지나(支那) 근대의 사상가 노신은 <광인일기(狂人日記)>에 식인의 피해망상증에 걸린 광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식인 풍습이 만연한 사회상을 폭로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또한 '국가는 사람이 사람을 먹는 역사사회'라고 정의한 바 있습니다. 지나(支那) 5·4운동의 사상적 지도자 오우(吳虞, 1874∼1949)는 '유교 = 식인'이라 하며 강력히 유교를 비판했습니다. 식인풍습은 공산화
된 지나(支那)에서 유교의 폐해 중 하나로 비판되었고, 최근에 이르러서야 점차 사라져갑니다.
오랜 역사와 문화를 자랑해 온, 유교문화의 종주국인 지나(支那)에서 식인 풍습이 꾸준히 이어져 내려왔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역사의 단 면입니다. 식인 풍습은 5천여 년간 합법적으로 존재했고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널리 행해졌습니다. 불과 얼마전 홍위병이 날뛰던 시기에도 지나(支那)전역에 광범위하게 식인풍습이 실존했으며 신용문객잔으로 대표되는 흑점이 존재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광인일기에 나타나는 주인공의 과대망상증은 노신이 정신병자를 묘사한것이 아니라 지나(支那)에서의 실제상황을 그대로 전하려했다는 점을 상 기하시면 이해가 쉬우시리라 생각 됩니다.(주인공은 주변 이웃이 자신을 살해하여 잡아먹으려한다는 피해망상증환자로 나옵니다)
노신이 아큐근성과 식인풍습이 지나(支那)를 망치는 2대악으로 보고 이것을 근절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가를 보면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오랜기간의 식인풍습은 노신의 말대로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게 만들고 신의라는 것 자체를 없애 버렷습니다. 지나(支那)인들이 신의를 말할때면 그들이 가장 위기에 몰렸을 때입니다. 그때만 예나 도덕, 신의 등이 나옵니다.
식인풍습 즉 약육강식의 단순한 논리는 그들의 특징적인 속성, 즉 강자앞에선 토끼가 되고 약자 앞에선 무서운 맹수가 되어버리는 것을 잘 설명해 주는 근거가 아닐까요? 일단 전쟁, 기근으로 식인풍습이 대대적으로 시작되면 잡아먹히는 인간의 종류와 순서에 일정한 법칙이 있었습니다. 일단 유괴하기 쉬운 어린이를 시작으로 여행자, 독신자 및 독거노인 등으로 순서가 옮겨갑니다.
나중엔 비교적 소규모의 가족단위를 이루는, 즉 처치하기 쉬운 가정을 다음 차례가 되고 비슷한 규모의 가족단위간에는 관에 줄이 있어 파벌에 속한자가 속한 가정이 그렇지 못한 가정을 잡아먹고 맨 마지막 단계에 가면 부모가 자식을, 남편이 아내를, 형이 동생을 잡아먹었습니다.
지나(支那) 특유의 대가족제도는 결국 식인풍습으로부터 자기자신과 가족을 지켜내려는 눈물겨운 제도이며 여러명이 뭉쳐서 숫적우위를 바탕으로
잡아먹힐 확률을 낮추고 생존확률을 높이려는데 주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잡아먹히는 순서상 쪽수가 많은 가정이 맨 나중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세계 최고 문화민족의 식도락
위에서 식인문화에 대해 이미 지적한 두 가지 경우보다도 더욱 끔찍한 일은 과거 지나(支那)의 미식가(美食家)들이 식도락을 추구하기 위해 사람고기를 상육(想肉)이라고 하여 즐겨 먹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요즘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오해는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지나(支那)에서는 진귀한 것을 특미(特味)로 봅니다. 미식가들이 인육을 먹는 것에 대한 기록들이 만만치 않게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제나라의 환공의 이야기입니다. 환공은 유명한 미식가였는데 그가 맛있는 요리를 찾자 요리사였던 역아(易牙)는 환공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자신의 세 살짜리 아들을 죽여서 요리해 바칩니다. 역아는 이로써 환공에 대한 충성심을 보증 받아서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지요.
뭐니 뭐니 해도 지나(支那)의 식인문화는 당나라 때가 전성기였습니다. 당나라는 세계적인 대제국으로 정치적으로 안정된 나라였기 때문에 고급 귀족문화가 크게 발달하였지요. 그런데 생각해봅시다. 나라는 안정되고 귀족들은 엄청난 부귀영화를 누리다 보니 이것저것 맛있는 것만 골라 먹다가 싫증이 나면 더욱더 진귀한 것을 찾게 됩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인육이 요리의 재료로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당나라 때는 전국 각지에 미식가들을 위한 상육(인육)을 판매하는 시장이 있었다고 합니다. 슬픈 얘기지만 인육은 쌀값보다 싸고 개고기의 1/5 정도였다고 합니다.
당나라 이전에는 인육이 암시장에서 남모르게 거래되었다가 당나라 이후에는 아예 인육시장이 개설되어 인육이 공개적으로 거래되었다고 합니다. 9세기 당나라 말기에 지나(支那)를 방문했던 페르시아 상인들에 의해 인육이 시장에서 공개적으로 판매되는 것이 목격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당나라 측천무후 때는 식인 문화의 극성기로 인육은 두 발 달린 양고기라 불렸으며 인육이 너무 많이 유통되어 다른 고기의 값이 폭락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원나라 때 도종의의 ‘철경록(輟耕錄)’에 친구를 젓갈로 만들어 먹거나 자기의 첩을 삶아 먹기도 하는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여러분들은 아마 “에이, 세계에서 대표적인 문화민족인 한족(漢族)들이 무슨 그런 짓을 … ” 하시겠지만 그게 아닙니다. 아예 인육을 파는 상설 시장까지 있었다는 것이지요. 구체적으로는 당나라 때의 양주(楊州)와 봉상(鳳翔), 송나라 때는 항주(杭州)와 변경(汴京), 명나라 때에는 개봉(開封)과 중경(重京), 청나라 때에는 안경(安京) 등에는 상설 인육시장이 개설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많은 지나(支那)의 서적들과 지나(支那)에 대한 찬미자 마티니(Martin Martini : 1614~1661) 등의 외국인들의 견문록에도 무수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자신이 직접 목격한 복주(福州)의 식인 풍습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더욱 끔찍한 것은 원나라의 도종의가 지은 ‘철경록(輟耕錄)’이나 송나라 장작이 지은 ‘계륵편’에는 사람고기를 요리하는 방법에 상세히 나와 있다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지나(支那)의 대표적인 의학 서적인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인체 각 부위의 약효에 대하여 상세히 기록하고 있지요. 12세기에는 한 사람당 15근 정도의 인육을 얻었다고 합니다.
명나라 때 사천(四川) 지방에 인육이 남자일 경우에는 한 근에 7전, 여자는 8전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가격은 다른 고기들과 비교했을 때 형편없었다는 것이죠.
이 모든 일들은 수천 또는 수백 년 전 과거의 일이니 이젠 이 같은 이야기로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없겠다고 생각하시겠지만, 불과 1백 수십여 년 전 증국번의 일기에 의하면 1860년 강소지방의 상육은 한 근에 90전이었는데 태평천국의 난 때 인플레가 심해서 130전까지 폭등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1900년대 초 군벌시대에는 상육이 90전이었다고 합니다.
청나라 말기에는 말레이계 사람의 인육을 수입하여 대나무 바구니에 담아서 공개적으로 판매하였고, 한족들은 이것을 보약(補藥)으로 먹었다고 합니다. 지나(支那)의 대표적인 근대 문학가인 노신(魯迅)은 ‘광인일기(1918)’에서 식인의 피해망상증에 걸린 광인(狂人 : mad man)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지나(支那)사회가 가진 구조적 병폐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작품에 나타나는 식인 풍습은 하나의 상징이나 비유로 봐야겠지만, 단순한 상징이나 비유라기보다는 실제 상황을 기반으로 묘사한 점이 눈에 띱니다. 그리고 이런 식인문화는 먼 과거의 얘기가 아닙니다. 1919년 식량 부족이 심했던 러시아의 수도에서 지나(支那)인들이 인육 장사를 하다가 총살되기도 했지요. 정말 현재 지나(支那)에 식인 문화가 사라졌는지 공연히 의심스럽기도 합니다.
조금은 극단적인 말이지만 지나(支那)의 식인 문화는 4천년 동안 지속되고 있으며 어쩌면 이 식인문화를 알지 못하고서 지나(支那)의 역사와 문화를 말하기도 어려운 일인지도 모릅니다. 한나라가 건국된 기원전 206년부터 청나라가 멸망한 1912년까지, 지나(支那)에서는 식인의 기록이 200차례 이상이나 정사(正史)에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1960 년대나 70년대까지도 암암리에 지나(支那) 전역에 식인풍습이 남아있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극단적인 말이겠지만 찬란한 중화 문명의 확산과 식인 문화는 거의 동시에 일어난 것은 아닐까요? 초기의 황하유역에서 장강을 거쳐 남지나(支那)로 확산되어 왔으니까요. 물론 이것은 인구의 증가에 따르는 식량 부족이 원인이겠지요. 그렇지만 세계 최고의 문화민족임을 자부하는 한족(漢族)의 식인 문화는 이해하기 어렵군요.
사족이 지만 음식에 대한 지나(支那)인들이 과도한 집착은 전 세계적으로 사스(SARS) 공포를 낳았습니다. 사스는 2003년 발생한 대표적인 괴질(怪疾)로 치료약이 아직도 발견되지 않아 전 세계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스는 지나(支那)의 독특한 음식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연구가 나오고 있지요. 즉 지나(支那) 언론의 대체적인 시각은 광동지역을 주변으로 사람들이 “네 발 가진 것 중에선 책상, 날아다니는 것 중에선 비행기, 물 속에선 잠수함 빼고 다 먹는다”는 식으로 야생동물을 남획해 먹다가 사스란 괴질을 불러들이고 말았다는 것이지요.
공자를 옹호하려는 친지나(支那) 쥐대가리들+친지나(支那) 홍어+조선족들의 댓글에 올려 놨던 댓 글
1990년대 중반경까지 일본에서 야키니쿠(불고기) 하면 일본인들은 무슨고기로 인식하고 있었을까?
물론 야키니쿠(불고기)는 제일교포들에 의해서 퍼진 한국요리인데
한국에선 보통 불고기에 사용되어지는 고기라하면 일반적으로 소고기와 돼지고기 두 종류지만
일본에선 오키나와 지역을 제외한 육지쪽에선 대체로 돼지고기로 만들어진 요리종류가 돈카츠등 몇가지 외엔 그다지 많지않고 잘 먹지 않는 편이다.
그러다보니 1990년대 중반경까지는 일본인들에게 야키니쿠에 사용되는 고기는 누구랄것 없이 소고기 란 대답이 나왔고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다.(실제 1990년 대 초 일본인들에게 물어 보고 들은 사실)
지금은 한국 관광와서 돼지고기맛을 알게 된 일본 관광객들에 의해 돼지고기를를 찾는 일본인들도 많아진 편이다.
고대 지나(支那:짱깨)의 해(醢)는 지나(支那:짱깨)인들에게 무슨 고기로 인식하고 있었을까~요???
그러고 공자놈께서는 해(醢)를 무슨 고기로 알고 즐겨 쳐 먹었을까~요??
他被处以最残酷的醢刑。 그가 가장 잔인한 해형에 처해졌다.
醢时古代的一种酷刑。 해(醢)는 고대 형벌의 일종이다.
-흥부의 성-
Virus republic of china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은 말!
세계의 민폐종족! 홍어와 지나(支那:)는
몰살이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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