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눈의 목격자의 영상물에 나타난 시민군 최초무장시점
광주사태 논리에서 몹시 중요한 것이 시민군의 최초 무장시점이다. 민간인들이 군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고 무장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느냐 없느냐가 바로 이 점에 달려 있다. 광주사태가 일어난지도 이미 어언 33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5.18을 주제로 토론이 시작되면 그 끝없는 논쟁이 뜨겁게 진행되는 이유가 바로 이 문제 때문이다. 무장반란이라는 엄청난 사건을 일으킨 광주사태 주동자들은 무장반란을 정당화시키는 수단으로 공수부대 집단발포 유언비어를 퍼뜨렸고, 공수부대가 발포하여 광주시민들이 무장을 하였다는 주장을 하였고, 채동욱 등 5.18 검사들은 그런 주장의 가정 하에 시위대의 무장을 정당화시키는 5.18 법리를 만들었다. 즉, 5.18 법리는 시민군 최초 무장시점이 5월 21일 오후 3시 이후라는 전제 하에 만들어졌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KBS의 힌츠페터의 영상물 공개로 말미암아 5.18 법리의 기본 전제가 와장창 깨져 버렸다.
5.18 사기꾼들은 5월 21일 아침 운전이 미숙한 시민군이 과속으로 군용차량을 몰며 전라도 44개 무기고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무기를 탈취하러 다니다가 일으킨 대형교통사고 희생자들의 관으로 23일 시체장사하며 애매한 공수부대에 누명을 씌웠다. 이렇게 공수부대에 누명을 씌우는 논리는 스스로 방어하기 위해 무장이 불가피하였다는 논리이다. 그러면 도대체 그들은 왜 20일에 무장하였는가? 힌츠페터의 영상물은 광주시민이 아닌 외지인 무장단체가 20일 광주로 들어오고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힌츠페터가 아래 사진을 촬영한 시점에 대하여 지금 인터넷상에서의 토론의 열기가 아주 뜨겁다. KBS의 영상물 <푸른 눈의 목격자>에서 공개된 이 사진은 5.18사기꾼들을 유리하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불리하게 해 주는 사진이다. 평화로운 도로 위로 민간인 무장단체가 군용트럭을 타고 들어오고 있다. 도대체 평화로운 도로 위에서 민간인들이 총을 든 채로 군용트럭을 타고 광주로 진입할 이유가 무엇이라는 말인가? 만약 이석기의 무장반란음모가 성사되어 RO 회원들이 저렇게 총을 들고 군용트럭을 타고 어떤 도시로 들어오면 정부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이석기도 만약 그 단계까지 진행되었다면 군경이 총을 쏘니깐 무장한 것이었다는 거짓말을 지어내어 무장폭동 행위를 정당화시킬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이 사진 촬영 시점이 중요해진 것이다. 5.18 대표 논객들은 힌츠페터가 이 사진을 23일 찍었다고 주장한다.
사실, KBS 나레이터는 위 사진 촬영 시점을 밝히지 않았다. 그런데 그 무엇으로 23일 찍은 사진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가? 힌츠페터가 19일 일본에서 한국 갈 준비를 하여 20일 오후에 광주로 왔을 때는 사진기자와 같이 올 수 있었다. 그러나 21일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23일 다시 왔을 때는 혼자서만 왔으므로 그의 사진 대부분은 20일 오후와 21일 오전 사이에 촬영된 것들이었다. 그러기에 저 천연색 샤진이 23일 사진이었을 확률은 극히 적다. 게다가 5월 21일 오후부터는 광주가 봉쇄되어 그 누구도 차를 타고 광주로 들어오는 것이 불가능하였다는 것이 5.18측 주장이다. 그런데 광주가 완전 봉쇄되어 있는 23일에 어떻게 시민군 군용트럭이 외지로부터 광주로 진입할 수 있다는 말인가? 5.18측 대표 논객들이 지금 광주가 21일 오후부터 완전 봉쇄되어 있었다는 5.18측 주장을 스스로 부정하고 있다. 광주봉쇄론을 차지하더라도 20일 오후부터 시위대가 눈에 띄는 대로 차량 징발을 하였기 때문에 시위대 혹은 시민군에 차량 징발을 당하지 않기 위해 21일 오전부터는 택시와 버스 운행이 완전 중단되었다. 그런데 사진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택시들과 버스들이 광주로 진입하고 있다. 따라서 저 사진이 21일부터 27일 사이에 찍힌 사진이라는 주장을 불가능하다. 23일에서 외지로부터 무장시민군이 저렇게 군용트럭을 타고 맘대로 광주로 진입할 수 있었으며, 그 앞뒤로 민간인 택시들과 버스들이 유유히 달린 것이었다는 5.18측 대표논객들의 주장은 도저히 성립이 불가능하다.
그러면 위의 사진에 대한 몇가지 객관적인 사실들을 짚어보자. 당시 광주로 진입하는 길은 나주에서 신의주1호선 국도로 광주 백운동을 경유 금남로와 도청 방면으로 갈 수 있었고, 또 하나의 길은 나주-송정 경유 광주 양동다리를 경유, 도청으로 갈 수 있었는데 두곳 모두가 진행방향이 동쪽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서산에 막 노을이 지기 시작할 무렵 찍은 사진이다.
힌츠페터는 그의 5월 20일자 수기에서 자기가 탄 시위대 트럭에 손도끼가 있었다고 기록하는바, 아래 사진에서 보듯 힌츠페터는 트럭 중앙의 손도끼 사진을 찍어 두었다. <푸른 눈의 목격자> 영상물이 이 사실을 선명하게 보여주므로 위 사진이 20일에 찍은 사진이라는 사실은 5.18논객들이 도저히 부정하지 못한다.
힌츠페터가 본 시위대 손도끼를 대표적인 시민군 윤석진도 보았다. KBS 나레이터는 숨기지만, <푸른 눈의 목격자>를 유심히 본 국민이 받는 충격은 시위대가 이미 5월 20일에 군용트럭을 몰고 다녔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시민군 윤석진은 손도끼와 일본 낫 등으로 무장한 시위대가 이미 19일부터 군용트럭을 몰고 다녔다는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윤석진의 증언은19일 쇠갈퀴와 낫과 쇠스랑 등이 시위대 무기로 등장했다는 김영택 기자의 기록으로 확증된다 (김영택 1988, 53).
5.18사기꾼들처럼 시민군 무장 동기가 21일 오후에 시민들이 군인 총에 맞아 죽으니깐 무장한 것이 아니라, 20일에 이미 총기를 소지한 목포의 깡패 조직이 군용 지프와 군용트럭을 타고 광주로 들어오고 있었다. 20일 오후 광주 입구에서 힌츠페터가 만난 무장단체는 광주시민들이 아니라 목포의 깡패조직이었다. 그들은 광주시민들로 구성된 시위대가 아니라, 외지인들이었다. 이미 5월 20일에 군용지프와 군용트럭을 몰고 다니는 무장단체가 광주로 진입하는 장면을 KBS의 영상물 <푸른 눈의 목격자>는 그대로 보여준다.
힌츠페터와 그의 사진기자, 즉 그가 말하는 취재진이 조총련 계열 운전사가 아는 샛길을 통해서 광주로 진입한 때는 5월 20일 오후였으며, 목포에서 온 무장조폭단이 힌츠페터를 앞세우고 따라오고 있었다. 그들이 왜 힌츠페터를 앞세웠을까? 외신 기자를 엎세움으로써 거둘수 있는 효과가 크다. 좌익들만 아는 샛길로 왔더라도 혹 검열을 당할시 유리하다. 그리고 외지에서 군용차량으로 동원된 조폭들에 대한 광주시민들의 거부감을 완화시킬 수 있다.
아래의 두 캡쳐물을 보면 힌츠페터 일행이 탄 트럭을 바짝 따라오는 목포 조폭들의 지프차에서 두 자루의 총이 보인다. 지프치 오른쪽(사진에서는 좌측)에서 옆으로 삐져나온 총 한 자루가 지프차가 광주에 진입하는 순간 그 총구를 60도 방향 하늘을 향하여 올리고 있다. 운전사 뒷좌석의 조폭도 운전사 머리 위로 앞을 향하여, 그러나 앞 트럭에 탄 힌츠페터를 겨누지 않도록 비스듬하게 총구를 겨누고 있는 모습이 힌츠페터의 영상물에 그대로 포착되었다. 힌츠페터는 자신의 영문판 수기에서 이 사실을 기록하였다.
그러면 촬영 날자에 대한 논란이 뜨거운 맨 위 사진 촬영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위의 두 장을 사진을 다시 보자. KBS 나레이터는 아래 장면 배경이 무등산임을 밝힌다. 아래 두 사진 다 그 배경이 무등산이요, 동일 차선이요, 날씨 상태며 그림자 방향으로 보아 같은 날 같은 시간에 같은 차선으로 광주로 진입하는 차량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로써 힌츠페터가 맨위 사진, 즉 바로 위 사진을 촬영한 날짜가 5월 23일이라는 5.18대표논객들의 주장과 달리 5월 20일 오후에 힌츠페터 일행이 광주로 진입할 때 찍은 사진이었음이 분명하게 입증된다. 5.18사기꾼들의 주장처럼 5월 21일 오후에 광주시민들이 자기 방어를 위해 총기로 무장한 것이 아니라, 외지인 무장단체가 그 다음날인 21일에 광주에서 총격전 상황이 벌어지게 할 목적으로 총기를 들고 침투하였으며, 그 총기를 이용하여 21일 오전부터 군 무기 탈취를 시작했던 것이다. 외지인 무장단체는 치안 혼란 상태를 야기한 다음 국군에게 누명을 씌울 목적으로 총기와 흉기 등을 소지하고 20일에 광주로 침투하였다. 따라서, 이제 5.18대표논객들은 20일에 민간인이 총기를 소지하고 군용트럭을 몰고 다니는 폭동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인지를 설명해 주어야 한다.
<푸른 눈의 목격자>의 아래 토막 동영상에서 1분 53초까지는 5월 20일 오후 광주 어귀에서 조우한 무장단체와 힌츠페터 일행이 함께 광주로 진입하는 장면이고, 1분 54초부터 갑자기 바뀐 장면은 그 다음날인 21일 오전 9시부터 시위대가 군납품업체 아세아자동차 공장에서 각종 군용차량을 탈취한 후 어느새 무기를 탈취한 시민군으로 변하여 도청을 향해 달리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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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가 이 영상물을 편집할 때는 5.18사기꾼들에게 불리한 장면들을 빼 버렸다. 위 동영상 23초부터 지프차에서 두 자루의 총이 보인다. 그런데 사실은 힌츠페터의 영상물 원본에서는 지프차를 바짝 따라오는 시위대 군용트럭에서도 세 자루의 총이 보이는 것을 감추려고 KBS는 그 트럭의 모습을 방영하지 않았다. KBS가 빼버린 그 중요한 부분이 5.18측이 제작한 또 다른 영상물 "오월 그 날이 오면"에서는 원본 그대로 있다. KBS가 삭제한 부분을 "오월 그 날이 오면"에서 찾아 복원한 영상물이 https://docs.google.com/file/d/0B4_qp7ggJSsJOFhId0ZtV1lNMkU 에 있다. 이 짧은 동영상에서 5초부터 14초까지가 바로 KBS가 삭제한 장면들이다. "오월 그 날이 오면" 제작자는 이 장면을 흑백 화면으로 처리하였지만 그럼에도 군용트럭 적재함에 올라탄 목포 조폭들이 총을 들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두 명의 조폭이 총구를 공중으로 향하고 총을 들고 있는 것이 보이고 트럭 오른쪽에도 총이 45도 각도 위로 거치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그 다음 날 오후 전남도청을 점령한 후 시민군이 밤새도록 공중을 향하여 총을 쏘며 광주 시가지를 차를 몰고 다녔는데, 바로 이런 모습이었다. 아무리 깡패들이라지만 민간인은 저렇게 총을 사용하지 않기에 이들의 정체가 궁금해진다.
트럭 앞면을 보면 새 트럭을 탈취하여 몰고 다닌지 몇 시간 만에 충돌 사고를 낸 흔적이 보인다. 그 다음날 아침에 전라도 44개 무기고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무기를 탈취하기 위해 광주 외곽도로를 다니다가 큰 충돌사고를 많이 내어 많은 시민군이 희생되었다.
영상물 제목을 <푸른 눈의 목격자>라고 붙여 놓고서는 KBS는 도대체 무엇이 두려워서 이 장면을 삭제한 것일까? 푸른 눈의 목격자가 목격한 것이 이것이고, 5월 20일 광주로 침투한 목포 조폭들이 이렇게 이미 총기 소지를 하고 있었다는 이 사실이 5.18의 진실을 위해 중요한 것인데 무슨 이유로 삭제하였던 것일까?
목포의 조폭들은 광주로 침투할 때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르고 있었는데, 이들이 바로 그 다음날 아침 무기 탈취 등 무장봉기 주동자들이었다.
총을 위로 치켜들고 공중 발사 자세를 취하고 있는 조폭들이 총기 다루는 모습이 능숙해 보인다. 여기서 이 조폭들은 어떻게 5월 20일에 이미 여러 자루의 총기를 확보할 수 있었을지가 궁금해진다. 오른쪽의 줄무늬 셔츠를 입고 있는 조폭의 두발 스타일이 아주 특이해 보인다.
광주로 진입하는 목포 조폭 차량 행렬 중 가장 뒤에 따라오는 청색 용달차 범퍼 위에 "김대중 선생 만세"라고 쓴 현수막이 걸려 있다. "김대중 선생 만세"??? 도대체 언제부터 깡패들이 이렇게 정치에 많았으며, 거리 정치에 발벗고 나섰는가? 이들은 목포의 김대중 계열의 깡패 조직이었다.
http://www.docstoc.com/docs/39206482/kwangju-secret-of-kwangju-doc 에 보존되어 있으며, 목포 김대중 계열 별동대 5월 20일 광주 침투를 클릭하면 5월 20일 김대중 계열 별동대 조직 100여명이 광주로 올라온 사실을 기록한 문건이 있다.
이 수기에서 사실관계를 바로 잡아야 할 문구도 있다. 밑에서 넷째 줄에서 "young men and students"(젊은이들과 학생들"은 잘못된 기록이다. 조총련에게 들은 대로 시위대는 학생들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기에 깡패들이 그의 눈에는 학생들로 보였지만 깡패는 학생이 아니었다. 이들은 광주의 전남대 학생들이 아니라, 목포에서 올라온 김대중 별동대였다.
한국인들도 어떤 선입견에 사로잡혀 광주사태를 보고 있는 판에 한국에 대해서 잘 모르는 힌츠페터가 19년 전을 회상하여 쓴 수기에 옥의 티가 있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이런 록의 티를 제외하면 그의 수기에는 너무나도 중요한 사실들이 담겨있다. "a jeep, carrying five armed people wearing headbands"(머리에 띠를 두른 다섯 명의 무장한 사람들)이란 문구는 분명히 5월 20일에 이미 무장시위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맨 위에서 네 번째 사진, 즉 "우리 취재진은 샛길을 통해서 광주로 진입하는데 성공했다"는 자막이 있는 사진에서 보이는 지프차도 바로 이 서술에 해당한다. 이 사진에서도 총을 들고 있는 조폭 모습이 역력히 보인다. 머리에 두른 흰수건이 목포의 김대중 계열 별동대 비표였으며 그 다음날 광주에서 무장봉기를 주동하고 시민군을 조직하였을 때 일종의 계급장 역할을 하고 있었다.
"armed with nothing more than sticks or small axes"(막대기와 작은 도끼들로 무장한)이란 문구에서 막대기라는 단어에 의문의 여지가 있다. 조폭 조직이 동원될 때 각목을 휴대하는 상식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독자들이 무심코 넘기기 쉽지만 당시 한국의 예비군 무기고에서 탈취할 수 있는 무기에 대해 문외한이었던 힌츠페터가 달리는 차에서 멀리 슬쩍 보고 막대기로 인식한 것을 우리가 화면을 정지시키고 캡쳐해서 보면 주로 장총이다. 유언비어에 세뇌된 채로 시민군 옹호를 위해 쓴 글에서보다 영상물에서 우리가 관찰하는 총기 수가 훨씬 더 많다. 그리고 힌츠페터가 조금도 감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시위대 무기가 작은 도끼 즉 손도끼였다. 목포의 별동대가 20일에 손도끼를 지참하고 광주에 출현한 때부터 시위대가 자상을 입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대검에 찔린 것이 아니라, 시위대 손도끼에 자상을 입은 것이었다. 별동대가 21일 새벽 광주역에서 확보한 시체장사용 시신 두 구도 자상을 입은 시신이었다. 별동대는 손도끼에 자상을 입은 시신 두 구를 전옥주를 이용해 무장봉기 선동용으로 이용하였다.
글 작성일: 2013년 10월 14일; 최종 업데이트 10월 16일
이 글을 옮겨가실 때 사용하실 출처 링크는 http://www.study21.org/518/video/5-20.htm 입니다.
홍어종특 뒤통수
홍어종특 감성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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