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들면서 전형적인 홍어형으로 변하는 문근영 면상
남평문씨는 문근영의 본관이며, 문재인의 본관이기도 하다.
전라남도 나주시 남평읍.
홍어가 경상도에 살았다고 신분세탁하듯, 문재앙도 경상도라고 주장하지만 문재앙은 뼈속까지 좆라도인 이유임.
문근영 대학입시 당시 뒤통수도.ARABoZA
문근영의 인기탓에 광주시교육청은 문근영을 독방에 혼자서 수능을 보게 하였고, 수험생과 네티즌들 사이에서 논란이 일어남.
수험생 부모들의 요청이 있어 그랬다는 광주시 교육청의 해명에 따라 논란은 잠시 접어두고 문근영은 수능을 무사히 마쳤다.
그러나 수능을 봐서 정시로 당당히 가겠다던 홍어년 문근영.
성균관대에 수시를 지원한 사실이 나중에 밝혀진다.
수능 점수로 정정당담하게 가겠다고 해놓고 자기 추천전형으로 수시를 지원했던것이다.
결국 특례로 성균관대에 합격을 하였고 연극영화가 아닌 인문학계열로 가게 된다. (그리고 국어국문학과로 배정된다) 홍어년의 뒤통수.
그렇다면 문근영의 수능점수는 몇점일까?
원점수는 300점대 후반에 등급은 언어 3등급 수리 3등급 외국어 4등급 탐구 1144라고 한다.
웬만한 인서울 대학은 갈 수 없는 성적이었음.
문근영의 집안도.ARABoZA
이적단체 범민련, 문근영 외조부에게 추모시를?평생을 적화통일에 매진해온 류낙진
이적단체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이하 범민련)이 2일 빨치산으로 활동해온 비전향장기수 류낙진 사망 8주기를 추모하는 글을 잇따라 게재했다.
영화배우 문근영의 외조부로도 알려져 있는 류낙진에 대한 범민련의 추모의 글은 그가 생전에 적화통일 활동에 대한 영향력을 실감케 하고 있다.
범민련은 추모사를 통해 류낙진의 정신을 이어받아 적화통일에 매진할 것을 다짐했다. 범민련은 “지금 조국은 한세기하고도 반이 넘도록 진행되어 온 숙적 미국과의 마지막 대결전으로 숨가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면서 “미국은 1950년 전쟁부터 핵을 앞세워 우리민족에게 끊임없이 핵전쟁의 위협을 가해 왔으며, 단 한날 한시도 화약내가 가실 날 없이 북을 상대로 한 핵선제공격훈련을 벌이고 있다”며 미국을 강도높게 비난했다.
이어 “수 많은 애국자들이 나라의 자주와 통일의 제단에 자신의 삶을 기꺼이 바쳐 왔던 우리민족의 자주통일역사는 여전히 투철한 애국자, 강고한 실천가, 더 겸손한 활동가, 단결에 능한 일꾼을 절박하게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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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적단체 범민련 남측본부 고문으로 평생을 적화통일에 매진해온 류낙진. 영화배우 문근영의 외조부로 알려져 있다. ⓒ 누리꾼 블로그 캡쳐 |
범민련은 류낙진의 생전 활동을 “사상과 조직, 신념과 동지애를 한시도 소홀히 하지 않고 그 누구에게나 감화와 설복을 정력적으로 펼치셨다”며 추켜세웠다.
또 “살아 있는 사람이 먼저 가신 선배 혁명가들을 추모한다는 것은 단순히 추억의 사진첩을 펼쳐 놓는 것이 아니고 전진과 분발, 혁신과 단결을 위한 교훈과 자각을 곱씹고 결의하는 소중한 계기”라며 2013년을 우리민족끼리의 정신과 원칙, 장엄한 반미투쟁의 대열에 설 것을 촉구했다.
박종화 범민련 광주전남연합 부의장은 추모시에서 “민중이 근본인 생활방식과 스스로 규율을 세워 나로부터 실천하는 삶의 근본을 다시 한 번 새겨보는 선생님의 일생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라며 류낙진을 애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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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배우 문근영과 외조부 류낙진 ⓒ 누리꾼 블로그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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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낙진은 6.25남침전쟁이 발발하자 52년 3월까지 지리산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하다 체포되어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민간 재판소로 이양되면서 5년으로 감형되기도 했다. 57년 출소한 뒤에도 63년 ‘혁신정당’사건, 1971년 ‘호남통혁당재건위’사건, 1994년 ‘구국전위’사건, 2002년 빨치산위령비 비문작성 사건 등으로 처벌을 받는 등 대남적화통일을 위해 매진해왔다.
류낙진은 이적단체 범민련 남측본부 고문으로 활동해오다 사망했고, 외손녀인 배우 문근영의 가족들은 부의금 5000만원을 통일운동에 써달라며 이적단체 범민련에 기부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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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www.bluetoday.net/news/articleView.html?idxno=3805 |
문근영은 빨치산 빨갱이 통일혁명당 류낙진의 외손녀임.
류낙진은 20살에 남조선로동당에 입당해서 한국전쟁 당시는 전라도 일대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하다가 체포, 출옥, 테러, 반국가 활동으로 다시 체포, 출옥을 반복하다 2005년 사망함.
당시 유가족(문근영가족)은 장례때 들어온 부조금 5천만원을 반국가단체 범민련 남측본부에 기부한적도 있음.
문근영 아역스타 당시 인터뷰.
요즘 언론이 문근영의 가문을 띄어줄 수록 국민이 궁금해 하는 점들이 있다.
예를 들면, 문근영의 작은 외조부와 문근영의 어머니 성함이 똑같다.
빨치산 류락진은 자기 남동생의 이름을 따서 자기 딸의 이름을 지었다는 말인가?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그러나, 류락진의 그의 남동생 류선영의 나이차가 무려 26세이다. 류선영의 유일한 작은 외조부가 류선영인데 큰 외조부와 26세의 나이 차이가 난다는 말인가!
그리고 언론은 류선영을 1980년 5월27일 도청을 사수하였던 시민군으로 미화하지만 사실을 그러하지 않다.
문근영의 외조부는 도청 사수 시민군이 아니었는데, 왜 언론이 거짓말을 한다는 말인가?
도청 사수 시민군은 이른바 친일작가라는 김완섭씨였지, 류선영이 아니었다.
그리고, 5.18측의 요청으로 시행되었던 1995년 검찰의 조사에 따르면 류선영은 도청사수 시민군은커녕 시민군도 아니었다.
1980년 5월 27일 도청진압작전 때의 시민군 편의 경험에 대해서는 실제로 도청사수 시민군이었던 이의 증언에 의존해야 한다.
그러나, 세간에 알려진 유일한 도청사수 시민군은 김완섭씨이다.
이 경우 문제는 그의 증언의 정확성이다. 김완섭씨는 도청사수 시민군이었기에 5.18측의 대표적 유공자이다.
그러나, 한쪽으로 쉽게 치우치며 과장하는 경향이 있는 그의 증언의 정확도는 과연 얼마인가?
한가지 분명한 것은 지금 좌익언론이 민주화 투사로 미화하고 있는 도청사수 시민군은 이른바 친일작가 김완섭이었지, 문근영의 작은 외조부가 아니었다.
여기 그러면 문근영의 작은 외조부는 누구였느냐의 의문점이 있다.
그는 1954넌의 태어났으며, 그때 류락진은 27세의 지리산 빨치산이었다.
'민중의 소리'는 <지리산 대성골에서 열린 '빨치산 추모제'>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류락진의 1954년 회고담을 이렇게 보도한다.
"오늘 우리 지리산의 동지들이 50년이 훨신 넘는 세월을 건너뛰어 여기, 대성골의 칠성봉 아래에 모였습니다. 수많은 해방전사들의 넋을 기리고 그때의 가열찬 해방전쟁의 투쟁을 되새기며 이곳에 서 있습니다. 여기 모인 동지들 중에는 구빨치산 때부터 해방전쟁에 복무했던 동지도 있고 조국해방전쟁 이후 미제와 그 주구들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전략적 후퇴시기에 빨치산 대오에 들어와 활동했던 동지들도 많이 있습니다."
전라도를 대표해 추도사를 낭독한 류락진(76세) 선생은 "박헌영, 이승엽의 종파반당분자들이 심어놓은 차일평과 그 졸당들의 반역행위로 많은 아지트가 파괴되고 미제의 세균전에 의하여 많은 동지들이 재귀열이라는 병으로 죽고 시달린" 조직적 우여곡절과 함께 빨치산 전몰 당시를 회고했다.
"남은 빨치산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체포되어 1954년 가을, 지리산은 총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체포된 많은 동지들이 고문과 학대로 죽어나갔고, 그대로 질긴 목숨을 이어온 동지들은 인류 역사에 없는 비전향장기수라는 이름을 달고, 30년 40년을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전향공작이라는 갖은 살인적인 고문과 학대를 이겨낸 동지들은 조국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면, 그해 1954년에 남동생 류선영이 태어난 셈이니 1954년에 대한 그의 회고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이 29세에 얻은 동생과의 관계는 외형적으로는 형과 동생의 관계라기보다 부자지간의 관계로 보인다.
류락진이 빨치산으로서의 첫 생애를 끝냈을 무렵, 동생 류선영은 빨치산이 사라진 조국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
문제는 그 후 50년이 지난 2004년에도 류락진은 조국이 북조선이라고 말하고 있다는데 있다.
그에게 남동생의 조국은 어디였는가? 그에게 외손녀의 조국은 어디였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 여하에 따라 문근영이 류락진이 관계했던 통일단체(이적단체)에 기부한 의미가 달라지는 것이다.
실제로는 류선영이 도청사수 시민군은커녕 시민군도 아니었음에도 좌파 언론이 그를 도청사수 시민군으로 미화할 때 그 의미는 통일운동가 류락진의 정신을 이어받은 시민군이 된다.
그러나, 그런 미화는 류락진이 자기 동생 류선영의 조국을 어디로 보았느냐의 질문으로부터 독립될 수 없다. 사실, 한국전 이후의 세대는 한국전이 종전되었기 때문에 태어날 수 있었다. 류선영 역시 한국전이 종전되고 빨치산이 사라져 치안이 안정된 조국에서 1954년에 태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실탄 30만발을 보유한 무장시민군이 하루 만발씩 아무데나 쏘아대어 광주의 치안이 불안하던 때에 사망하였다. 그러면 무엇이 그의 사망사고 원인이었는가?
문근영이 거액을 기부하던 단체도.ARABoZa
북한과 싱크율 100%를 보이는 주장을 하고 다니는 이적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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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뒤졌을 때 범민련 남측본부 ㅋㅋㅋ
이제 빨갱이년 문근영은 그만.ARABoZA
[출처] 빨갱이년 문근영을.ARABoZA
[링크] http://www.ilbe.com/11059513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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