退屈しないように シニアの暮ら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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さて何をしようか

法頂 無所有より

2012-11-26 11:24:10 | 韓で遊ぶ
復元、仏国寺
真昼の日差しには変わりはないが、初秋の風が感じられるこの頃、朝早く井戸端に行くと気の早い落ち葉がいっぱいに落ちていた。枝の端でゆらゆらする霧の重さに耐え切れず落ちてしまったのだ。夜の森をかすめていく雨の音を寝床でよく聞く。夏にしぼんでいた熱情が吹き上がってきたようだ。雨に洗われた空はどうだと言うぐらいに高くなった。もはや暑くてくすんでいる夏の雲ではない。静まっていた病気がいきなり再発しようとしている。パッパッと払ってしまって出て行きたくなる衝動が。どこにも束縛されずに自由になりたい、その翼が広がってきた。こんな風にして昨日やってきた所が仏国寺。新たに復元された仏国寺だ。秋になるといきなり訪ねてくる慶州。新羅1000年の夢が香るソラボル。
初めて来た人にも見慣れた感じのする、そんなふるさとのような慶州。どこに行っても懐かしい姿だ。今では礎の石さえも埋もれている黄竜寺、その礎を見ても。そして鞍山である南山と左右に連なっている稜線だけを見ても心が満ちてほのかな香水のような息のできる故郷がまた慶州だ。
どこでもかつての都に行くと感じるように慶州にもどこかガランとした感じ、何かで満たしきれない切ない、そして船が発った船着場のようなそんな雰囲気が心を引くのだ。
その中でも仏国寺はなんとなく寂しく、切ない新羅1000年の残影を一抱え抱えた伽藍だ。欄干が落ちてしまった青雲橋、白雲橋の柔軟な曲線、色はあせても荘重な紫霞門、飛ぶように翼を上げた泛影楼、そして前庭には紫霞門の左右に見上げる釈迦塔と多宝塔の空間、、
このようなものが私たちに1000年の歳月を一っ飛びに飛び越えさせてくれた。しかし、もはやそのような記憶は完全に過去完了形だ。
復元された仏国寺はそのような回顧調の感傷の入る余地がない。多くの改修をしたのですがる余白がないと言うことだ。何よりも四方に張り巡らされた回廊をみるとかつて姿かを想像することができない。そしてきらびやかな色彩が1973年に立っている今日の私たちを意識させる。
仏国寺は4年かけて多くの人力と財力で健全に復元されたのだ。石ひとつが、垂木ひとつでもぞんざいにせず、すべてが科学的な考証によってほとんど原型通りに復元された。原型通りに復元されたと言うが、過ぎ去った1000年の歳月が返って色を失った感じだ。
関係当局と専門家の粘り強い熱情と誠意に敬意を表さずにはいられない。
その一方で私たちが寂しく思うことは、これだ。
ずっと切なく、寂しく思うことは、今となっては慣れ親しんできたあの仏国寺がなくなってしまったことだ。
1000年の歳月を経た伽藍の雰囲気がどこかに姿を消してしまったのだ。復元された仏国寺には、奥ゆかしい風景の音の代わりにたくましく力強いセマウル行進曲が鳴り響いているようだ。
原本はこちらか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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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頂 無所有

2012-11-24 20:41:39 | 韓で遊ぶ
無所有
「私は貧しい托鉢僧です。私が持っているものといえば糸車と刑務所で使っていたご飯茶碗、ヤギのミルクの入っていた空き缶一つ、ぼろぼろになった布6枚、タオル、そしてたいしたことのない評判、これだけです。」
マハトマ ガンジーが1931年9月ロンドンで開かれた第2回円卓会議に参席するために行く途中、税関で所持品を見せながら言った言葉だ。Kクリパルラニが編集した「ガンジー語録」を読んでこの句節を読んで私はとても恥ずかしくなった。私が持っているものがあまりにも多いと思ったからだ。少なくとも今の私の身の程では。
事実、この世にはじめて生まれてきたときは何も持ってこなかった。生きるほどに生きてこの世の籍から消えて逝くときにも何も持たないで行く事になる。しかし、生きてみるとあれや、これやと自分のものだという考えが生じる。もちろん日常に必要なものだということもできる。しかし、なくてはならないほどに絶対に必要なものだけだろうか?考えてみるほどに、なくてもいいぐらいの物が少なくない。
私たちが必要に迫られてものを持つようになるが、時にはそのもののために気を使うような場合も少なくない。だから、ものを持つということは、見方を変えると何かに束縛されるということだ。必要に迫られ持ったものが私たちをむしろ不自由に束縛し、ある時、主客転倒し私たちは持つことにやられてしまう。だから、多くのものを持っているということは自慢できることにはなるけれど、それだけ多くに縛られているという側面も同時に持つことになる。
私は去年の夏まで蘭の花を二鉢大事に本当に大事に育てていた。3年前今の茶来軒に移ったときにある僧が私に送ってくれたものだ。
一人暮らしている所なので、生きているものといえば私とその蘭だけだった。その蘭のために関係書籍を読んで、その蘭の生育のためにハイポネックスとか言う肥料を海外に渡った友達に頼んで買ったりもした。夏になれば涼しい日陰に移してやらなければならないし、冬には必要以上に室内の温度を上げたりもした。
こんな真心を早くに父母に対してしていたら、孝行者といわれても余りあるぐらいだ。このように大事にした甲斐あって春先にはほのかな香りの薄緑色の花を咲かせ喜ばせてくれ、葉は三日月のようにいつもすがすがしかった。茶来軒を訪ねてくる人は皆みずみずしい蘭を見ていいねと言った。
去年の夏、梅雨の晴れ間のある日ポンソン寺に転虚老師に会いに行く用があった。昼間になると、梅雨空に隠れていた日差しが目にまぶしく、川の水に反射しゆらゆら揺れ、森の中の蝉の声がいっそうせわしくなった。
あっ!この時になってふと思い出した。蘭の鉢を庭に置いたまま出かけてきたのだった。久しぶりに出た日差しが返って恨めしかった。暑い日差しにぐったりしている蘭の葉が目に浮かびもたもたしてい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あたふたと来た道を引き返した。だめだろうか。葉はぐったりしていた。
何ということを、しまった、と思いながら泉の水を汲んでかけてやってみたらやっと首をもたげた。だけど、どこか生き生きとした力が抜けたような感じだった。
私はもはや、全身で、そして心の中で切々と感じた。執着と言うことは苦しいことであることを、そうだ、私は蘭の鉢に執念してしまったのだ。この執着から抜け出さなければいけないと決心した。蘭を育てようと遊行期にも旅にも行けないまま、じっとしていた。外に用があってしばらくの間家を留守にする時も換気をために窓を少し開けておかなければならず、鉢を出したまま出かけてすぐに思い出して引き返して中に入れてまた出かけたことも1回2回ではなかった。それは本当にひどい執着だった。
数日後、蘭のように言葉の少ない友人が遊びに来たので、彼の胸に蘭の鉢を抱かせて帰した。やっと私は束縛から抜け出したのだ。飛ぶようなさっぱりした解放感。3年近く共に共に過ごした有情を抜け出したのに悲しさとか虚しさよりもさっぱりした気持ちが先立った。
この時から私は一日にひとつずつ捨てなければならないと自ら心に決めた。蘭を通して無所有の意味のようなものを体得できたと言おうか。
年限の歴史はどうかしてみると所有史のように感じる。より多くの自分のものを持とうとするために終わりのなく戦っているようだ。所有欲には際限がなく休日もない。ただのひとつでも多く持とうとする一念でゆれているのだ。物ばかりでは満足できずに人まで所有しようとする。その人が自分の意思のとおりにならなければとんでもない悲劇も起こしながら。正常心も持つことができないくせに他人を所有しようとすることだ。
所有欲は利害と正比例する。それは個人だけではなく国家間の関係においても同じだ。機能の盟邦うは今日の敵になると言いながら、互いに困惑した国同士、親善使節を交換するという事例を私たちはいくらでも見ている。それはただ所有を基においた利害関係のためだ。もし人間の歴史が所有史から無所有史にその方向を変えたらどうなるだろうか。たぶん争うことはほとんどなくなるだろう。差し上げることができなくて争うことは聞いたことがない。
ガンジーはまた、こんな言葉も言っている。「私は所有が犯罪のように思える、、、」それは何かを持ったならば、同じものを持持ちたいと思っている人が同じようにもてるときに恨めしいことになる。しかしそれはほとんど不可能なことであり、自分が所有に対して犯罪のように自責しない訳には行かないと言うことだ。私たちの所有と言う観念が時には私たちの目を見えなくする。だから自分の程も見極めるまもなく浮かれるのだ。しかし私たちはいつか一度は何も持たないで状況に戻るだろう。非常に多くのものでも私たちをどうすることもできないだろう。
大きく捨てた人が大きくいただくと言う言葉がある。物によって心を痛めている人々においては一度ぐらい考えてみる言葉だ。何も持たないときやっと全世界を持つと言うことは無所有の逆理だか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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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頂 無所有

2012-11-24 08:20:31 | 韓で遊ぶ
무소유

"나는 가난한 탁발승이오. 내가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 젖 한 깡통, 허름한 요포 여섯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평판 이것 뿐이오."


마하트마 간디가 1931년 9월 런던에서 열린 제2차 원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가던 도중 세관원에게 소지품을 펼쳐 보이면서 한 말이다. K. 크리팔라니가 엮은 <<간디어록>>을 읽다가 이 구절을 보고 나는 몹시 부끄러웠다. 내가 가진 것이 너무 많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의 내 분수로는.


사실,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날 때 나는 아무것도 갖고 오지 않았었다. 살만큼 살다가 이 지상의 적(籍)에서 사라져 갈 때에도 빈손으로 갈 것이다. 그런데 살다 보니 이것 저것 내 몫이 생기게 된 것이다. 물론 일상에 소용되는 물건들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없어서는 안될 정도로 꼭 요긴한 것들 만일까? 살펴볼수록 없어도 좋을 만한 것들이 적지 않다.


우리들이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게 되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적잖이 마음이 쓰이게 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것이다.필요에 따라 가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얽어 맨다고 할 때 주객이 전도되어 우리는 가짐을 당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흔히 자랑거리로 되어 있지만, 그마만큼 많이 얽히어 있다는 측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나는 지난해 여름까지 난초 두 분(盆)을 정성스레, 정말 정성을 다해 길렀었다. 3년 전 거처를 지금의 다래헌(茶來軒)으로 옮겨왔을 때 어떤 스님이 우리 방으로 보내준 것이다.


혼자 사는 거처라 살아 있는 생물이라고는 나하고 그 애들 뿐이었다. 그 애들을 위해 관계 서적을 구해다 읽었고, 그 애들의 건강을 위해 하이포넥슨가 하는 비료를 바다 건너가는 친지들에게 부탁하여 구해오기도 했었다. 여름철이면 서늘한 그늘을 찾아 자리를 옮겨 주어야 했고, 겨울에는 필요 이상으로 실내 온도를 높이곤 했다.


이런 정성을 일찍이 부모에게 바쳤더라면 아마 효자 소리를 듣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렇듯 애지중지 가꾼 보람으로 이른봄이면 은은한 향기와 함께 연둣빛 꽃을 피워 나를 설레게 했고, 잎은 초승달처럼 항시 청정했었다. 우리 다래헌을 찾아온 사람마다 싱싱한 난(蘭)을 보고 한결같이 좋아라 했다.


지난해 여름 장마가 갠 어느 날 봉선사로 운허노사(耘虛老師)를 뵈러 간 일이 있었다. 한낮이 되자 장마에 갇혔던 햇볕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고 앞 개울물 소리에 어려 숲속에서는 매미들이 있는 대로 목청을 돋구었다.


아차 ! 이때에야 문득 생각이 난 것이다. 난초를 뜰에 내놓은 채 온 것이다. 모처럼 보인 찬란한 햇볕이 돌연 원망스러워졌다. 뜨거운 햇볕에 늘어져 있을 난초 잎이 눈에 아른거려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허둥지둥 그 길로 돌아왔다. 아니나다를까, 잎은 축 늘어져 있었다.


안타까워 안타까워 하며 샘물을 길어다 축여주고 했더니 겨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어딘지 생생한 기운이 빠져버린 것 같았다.


나는 이미 온몸으로 그리고 마음속으로 절절히 느끼게 되었다. 집착(執着)이 괴로움인 것을, 그렇다, 나는 난초에게 너무 집념해 버린 것이다. 이 집착에서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했다. 난을 가꾸면서는 산철(승가의 遊行期)에도 나그네길을 떠나지 못한 채 꼼짝 못 하고 말았다. 밖에 볼일이 있어 잠시 방을 비울 때면 환기가 되도록 들창문을 조금 열어 놓아야 했고, 분(盆)을 내놓은 채 나가다가 뒤미처 생각하고는 되돌아와 들여놓고 나간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말 지독한 집착이었다.


며칠 후, 난초처럼 말이 없는 친구가 놀러 왔기에 선뜻 그의 품에 분을 안겨주었다. 비로소 나는 얽매임에서 벗어난 것이다. 날듯 홀가분한 해방감. 3년 가까이 함께 지낸 \'유정(有情)\'을 따나 보냈는데도 서운하고 허전함보다 홀가분한 마음이 앞섰다.


이때부터 나는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 난을 통해 무소유의 의미같은 걸 터득하게 됐다고나 할까.


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소유사(所有史)처럼 느껴진다. 보다 많은 자기네 몫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있는 것 같다. 소유욕에는 한정이 없고 휴일도 없다. 그저 하나라도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일념으로 출렁거리고 있는 것이다. 물건만으로는 성에 차질 않아 사람까지 소유하려 든다. 그 사람이 제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는 끔찍한 비극도 불사(不辭)하면서, 제 정신도 갖지 못한 처지에 남을 가지려 하는 것이다.


소유욕은 이해(利害)와 정비례한다. 그것은 개인뿐 아니라 국가간의 관계도 마찬가지. 어제의 맹방(盟邦)들이 오늘에는 맞서게 되는가 하면, 서로 으르렁대던 나라끼리 친선 사절을 교환하는 사례를 우리는 얼마든지 보고 있다. 그것은 오로지 소유에 바탕을 둔 이해관계 때문인 것이다. 만약 인간의 역사가 소유사에서 무소유사로 그 향(向)을 바꾼 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싸우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주지 못해 싸운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간디는 또 이런 말도 하고 있다. \"내게는 소유가 범죄처럼 생각된다......\" 그는 무엇인가를 갖는다면 같은 물건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이 똑같이 가질 수 있을 때 한한다는 것. 그러나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므로 자기 소유에 대해서 범죄처럼 자책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소유 관념이 때로는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한다. 그래서 자기의 분수까지도 돌볼 새 없이 들뜨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 한 번은 빈손으로 돌아갈 것이다. 하고많은 물량일지라도 우리를 어떻게 하지 못할 것이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물건으로 인해 마음을 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 번 쯤 생각해볼 말씀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역리(逆理)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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