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そぞろ歩き韓国』から『四季折々』に 

東京近郊を散歩した折々の写真とたまに俳句。

翻訳(日本語→韓国語) 羆嵐37

2018-03-26 12:11:51 | 翻訳

「羆」の画像検索結果北海道紋別で仕留められた羆

羆嵐37 큰곰 폭풍

吉村昭(1927年~2006年)の「羆嵐」の韓国語訳。あくまでも韓国語学習のためにしているもので、ページ数は底本になっている新潮文庫版からのもの。今回ネイティブチェックをしていただきました。(P217 L4~P219 L3)

その2年後には、六線沢は無人の地となり、終戦までの30年間で100頭の羆が六線沢で仕留められた。(要約)

                                   끝

시마카와(島川)와 명케(明景) 집안에서 방치된 다섯개 시체는 다음날 아침에 계류 옆에서 화장됐다. 뼈를 담은 단지를 받은 사이타 이시고로(斎田石五郎), 시마카와 미키오(島川幹男), 명케 야수지로(明景安太郎)는 집을 버리고 떠났다.

록센사와(六線沢) 마을은 강설으로 묻히고 집집마다 취사하는 연기가 솟아올랐다.

다음 봄에 눈이 녹기 시작한 경에 마츠무라 초수케(

松村長助) 아내가 임신 육개원으로 유산했다.  큰곰이 활동기에 든 것을 안 마을 사람들은 침착성을 잃었는데 유산도 그 중의 한 표현이었다.

그해 가을에 작물을 수확하자마자 두 가족이 마을을 떠났다.

그 다음해 눈 밑에서 나타난 지표면에 풀이 싹트기 시작한 경에 가까운 산속에 아이누 사냥꾼이 새끼를 데리고 있는 큰곰을 죽이고 여름에는 얼음 다리 부근인 산림 속을 한 마리 큰곰이 멀어져 가는 것을  마을 사람이 목격했다.  그 직후에 두 가족이 마을을 떠나가고 가을 수확기 후에 다른 가족도 집을 버리고 동북 지방이나 홋까이도 각지로 흩어졌다.

록센사와(六線沢)는 무인의 땅이 됐다.

세월이 지나고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고 패전으로 인해서 종결됐다.

그 무렵에 야마오카 긴시로(山岡銀四郎)에 관한 소문이 산케베츠 (三毛別)방면에도 흘러 왔다.

긴시로(銀四郎)는 오니시카(鬼鹿) 마을에서 살면서 큰곰을 쏘고 있었는데 사이판(サイパン) 수비대의 전멸이 전해졌을 때에 뇌일혈로 쓰러져서 반신불수가 됐다. 남동생 부부에게 맡긴 아들은 그의 슬하로 돌아와 결혼하고 우체국에서 일하고 있었다.

종전 직후에 긴시로(銀四郎)는 동쪽 봉우리인 산등성이에 반드시 큰곰이 통과할 시기인데 거기로 자기를 데려가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들은 손이 심히 떨리는 늙은 아버지를 산속에 방치하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에 거부했는데 긴시로의 집요한 요구에 굴해서 10일분의 식량과 총을 지니며 긴시로(銀四郎)를 어깨로 곁부축하며 목적지인 산등성이에 도착해서 그를 놓은 채 산을 내려왔다.

10일 후에 아들이 산등성이에 가니 두마리 큰곰이 5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사살 당해서 누워 있었다.  큰곰은 모두 심장과 머리를 쏘였다.

긴시로(銀四郎)에게 그것이 마지막의 사냥이고 일개원  후에 여든 세살로 사망했다고 한다.

종전의 다다음 해에 만주(満州)에서 귀환한 여섯 가족이 홋까이도청의 지시로 록센사와(六線沢)로 들어왔다.  그들은 다이쇼(大正) 시대에 그 땅에 촌락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폐촌이 된 사정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다음 해 초여름에 근처 산속에서 수컷 큰곰을 아이누 사냥꾼이 죽이고 록센사와(六線沢)의 다리 가까이 옮겨 내려왔다.  그때에 사냥꾼의 말로 인해서 30여년 전에 일어난 일을 듣고 그 사건 부터 록센사와(六線沢) 부근에서 백 마리 가까운 큰곰을 사냥꾼이 죽였다는 것을 알았다.

입식자들은 바삐 가재도구를 챙기고 다른 땅으로 떠났지만 한 가족만 록센사와(六線沢)에 머물렀다.  그것은 계류의 가장 상류에 들어온 가족인데 지금도 그 땅에서 농경하고 있다.

 

★明景を아카카게あるいは 명케と二つで訳して混乱させてしまいました。未熟な翻訳文で失礼しました。

☆ネイティブチェックをしてくださった韓国人の大学院生にお礼を申し上げます。T・Eさんと、T・Hさん、どうもありがとうございました。

☆つたない翻訳に最後までお付き合いいただき、コメントを寄せてくださり、ありがとうござい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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