上級韓国語 - ちょんげぐりの世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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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다’  趙顕龍 著 하늘을 보다から

2023-11-16 | エッセイ
‘여의다’라는 말은 사용하기가 좀 그렇다.
「여의다」という言葉は、ちょっと使いにくい。

제일 먼저 떠오르는 표현이 ‘어릴 때 부모님을 여의고’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まず思い浮かぶ表現が「子供の頃に両親を亡くし……」という言葉だからだ。

‘여의다’라는 말은 슬픔이 가득한 말이다.
「여의다」という言葉は、悲しみがいっぱい詰まった言葉だ。

공허란 느낌으로 쓸쓸한 말이기도 하다.
空虚感のある寂しい言葉でもある。 

‘여의다’는 기본적으로 멀리 떠나 보냈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여의다」は、基本的に,遠くへ送り出したという意味を持つ。

그래서 번뇌를 여의었다는 말도 가능하다.
そのため、煩悩を「여의다」と表現することも可能だ。

하긴 번뇌야말로 멀리 떠나 보내야 하는 것이므로 우리가 여의어야 할 첫 번째일 수 있겠다.
実際、煩悩こそが遠くへ送り出さなければならないものであり、私たちが最初に送り出すべきものであると言えるだろう。

하지만 보통 ‘여의다’는 이별을 나타낼 때 쓴다.
しかし、通常は「여의다」は別れを表現するときに使われる。

크게 두 가지 경우에 쓰이는데 하나는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죽음에 의한 이별이고, 다른 하나는 딸을 시집보냈을 때 겪는 이별이다.
大きく分けて2つの場合に使われるが、1つは先ほど述べたように死による別れであり、もう1つは娘を嫁がせたときに経験する別れだ。

나는 ‘여의다’의 애절함을 왕방연이 세조의 명에 따라 단종을 영월에 유배시키고 돌아오며 지었다는 시 속에서 기억하고 있다.
私(著者)は「여의다」の切なさを、王房淵が世祖の命に従って端宗を寧越に流刑に送り、戻ってくる途中に詠んだ詩の中で覚えている。


천만 리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千万里の遠い道のりで、愛しい人を失い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아있으니
私の心を置く場所がなく、小川のほとりで座っていると

저 물도 내 마음 같아서 울며 밤길 가는구나. 
あの水も私の心のように、泣きながら夜道を行くのだ


어쩔 수 없이 명은 따랐지만 섬기던 임금을 유배시킨 슬픔이 느껴진다. 
仕方なく命に従ったが、仕えていた王様を流刑にした悲しみが感じられる。

여의는 것은 다시 볼 수 없음에 더 슬픔이 간절해지는 아픔이다.
여의다は、二度と会えないことにより、より悲しみが切なくなる痛みである。

소리 죽여 울며 밤새도록 흘러가는 물줄기의 느낌이다.
静かに泣きながら、夜通し流れる小川の感じである。

‘여의다’가 죽음에 대한 이별을 나타내는 경우는 주로 부모님을 잃었을 때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다. 
「여의다」が、死別を意味する場合は、おもに両親や愛する人を亡くした時だ。

고통이 가득한 표현이다.
苦痛に満ちた表現だ。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아픔일 때 쓰는 말이다.
どんな言葉でも説明できないほどの痛みがある時に使う言葉だ。

그런데 ‘여의다’를 딸 시집보냈을 때도 쓴다는 것은 충격이었다.
しかし、娘を嫁がせた時にも「여의다」という言葉を使うというのは衝撃だった。

왜 딸을 시집보냈을 때도 ‘여의다’라는 표현을 쓰는 걸까?
なぜ娘を嫁がせた時にも「여의다」という言葉を使うのだろうか。

딸과의 헤어짐이 그다지도 서글픈 이별이었단 말인가?
娘との別れがそれほど悲しい別れだったのだろうか。

나는 딸을 여의었다는 말에서 자식과의 헤어짐이 보여주는 아픔을 느낀다.
私(著者)は娘を嫁がせたという言葉に、子どもとの別れが示す痛みを感じる。

‘여의다’가 주로 죽음에 의한 이별을 의미하는 어휘였다는 점에서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을 보여주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여의다」という言葉は、おもに死による別れを意味する語彙であることから、二度と会えないような気持ちを示す表現であると言える。

예전에는 딸을 시집보내는 길이 완전한 헤어짐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았다.
昔は、娘を嫁がせるということは,完全な別れを意味する場合が多かった。

실제로 시집간 후에 다시는 친정에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実際に嫁いだ後、二度と実家に帰れないケースも多かった。

‘출가외인(出嫁外人)’이라 하고, ‘시집에 뼈를 묻으라.’며 다시 돌아올 구실마저 없애려고도 하였다. 
「出嫁外人」と称し、「嫁の家に骨を埋めろ」と言って、二度と戻る口実さえも無くそうとした。

딸을 여의는 것은 그런 애절한 느낌이었다.
娘を嫁がせることは、そのような切ない気持ちだった。

이제는 딸이 결혼해도 예전처럼 ‘여의는’ 것이 아니다.
もう以前のように、娘が結婚しても「二度と会えない」というわけではない。

다시는 못 만나는 경우도 거의 없다.
二度と会えないようなケースはほとんどない。

오히려 결혼하면 친정 곁에 사는 경우가 많다. 
むしろ、結婚すると実家の近くに住むことが多い。

시집은 갔지만 만날 일도 많다.
嫁いだとはいえ、会う機会も多い。

아이를 맡길 때도 제일 편한 곳이 친정이다.
子供を預けるときも、一番安心できる場所は実家である。

그래서인지 결혼식에서 눈물도 적어졌다.
そのためか、結婚式での涙も少なくなっている。

예전에는 신부도, 친정 부모도 눈물이 많았다.
昔は、新婦も、親も涙を流すことが多かった。

요즘 결혼식장에서는 웃는 신부들이 많다.
最近の結婚式では、笑顔の新婦が多い。

신부가 웃으면 딸 낳는다는 말도 있었는데 이제 옛말이 되어 버렸다.
「新婦が笑うと、娘を産む」という言葉もあったが、今は昔話となってしまった。

요즘에 자식을 여의는 눈물은 오히려 아들이 군대를 가거나 자식이 유학을 가는 장면에서 자주 보인다.
むしろ,最近、子供との別れの涙は、息子が兵役に行くか、子供が留学に行く場面でよく見られる。

다시 못 볼 것은 아니지만 안쓰러움에 마음이 아려온다.
二度と会えないわけではないが、切なさで、胸が痛む。

품안을 떠나가는 것이다. 
抱きしめていたものが、いなくなってしまうのだ。

이별을 경험해 본 사람들은 아린 마음을 안다.
別れを経験した人は、切なさを知っている。

단순한 걱정도 아니다.
単なる心配でもない。

단순한 그리움도 아니다.
単なる寂しさでもない。

説明できない哀しみである。
설명할 수 없는 애달픔이다.

오늘 TV에서 한국으로 시집 온 사람들이 고향을 방문했다가 돌아오는 모습을 보았다. 
今日、テレビで韓国に嫁いだ人たちが故郷を訪れて,韓国に戻ってくる姿を見た。

모두 눈물이 그치지를 않았다.
みな,涙が止まらなかった。

우리말 ‘여의다’의 의미가 그대로 마음에 전해졌다. 
韓国語の「여의다」の意味は、そのまま心に伝わった。

한국에 와 있는 여성 결혼이민자들을 더 따뜻하게 돌봐주기 바란다.
韓国に来た女性の結婚移民者たちをもっと温かく見守ってほしい。

멀리 계신 부모님의 그리운 눈물이 하염없이 흐른다.
遠くにいる両親の恋しい涙が、止まらないほど流れる。

*この文章は조현용(趙顕龍) 韓国慶煕大国際教育院院長 著 하늘을 보다から。慶煕大国際教育院は外国人のための韓国語学習プログラムを運営し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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