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明のターンテーブルThe Turntable of Civilization

日本の時間、世界の時間。
The time of Japan, the time of the world

거짓 비난의 요소

2024年07月21日 13時46分36秒 | 全般

2023/7/20
다음은 주간 신초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다카야마 마사유키의 연재 칼럼으로, 오늘 공개되었습니다.
이 글은 그가 전후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저널리스트임을 증명하는 글이기도 합니다.
오래 전 전 세계 프리마 발레리나들이 존경하는 모나코 왕립발레학교의 원로 여교수 한 분이 일본을 방문했습니다.
당시 그녀는 예술가의 존재 의의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녀는 “예술가는 숨겨지고 은폐된 진실을 밝히고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녀의 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다카야마 마사유키는 전후 세계 유일의 저널리스트일 뿐만 아니라 전후 세계 유일의 예술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반면에 오에, 고인을 욕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래 다카야마 마사유키의 예를 따르자면) 무라카미를 비롯해 스스로를 작가라고 부르거나 예술가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은 예술가라는 이름을 붙일 자격조차 없습니다.
그들은 숨겨진 진실을 밝히고 말하기보다는 아사히 신문과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낸 거짓말을 표현했을 뿐입니다.
이들의 존재는 일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 세계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진정한 예술가는 소수에 불과합니다.
이 논문은 오늘날 세계에서 다카야마 마사유키보다 노벨 문학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제 말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훌륭한 증거입니다.
일본 국민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이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입니다.

거짓 고발의 요소
미군이 일본을 점령하고 있던 1949년 7월, 일본 국철 사장 시모야마 사다노리가 실종되었다가 다음 날 아야세역 근처에서 열차 바퀴 밑에서 두 동강 난 채 발견되었습니다.
그는 일본총독부의 일본 국철 직원 대량 해고 요구에 상당히 괴로워했다고 합니다.
나카이가 전날 밤 임시로 머물렀던 여관에 대한 증언도 있습니다.
그 결과 그가 자살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사망한 것은 일본 국철 사장이었습니다.
일본 국철은 권위자인 도쿄대 법의학과의 후루하타 다네모토 교수에게 부검을 의뢰했습니다. 
통상적인 부검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 이 기관은 범죄 현장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열차가 시신을 토막냈을 텐데 이상하게도 출혈이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초보 기자였던 저는 열차 앞에서 뛰어내려 자살하는 현장에 자주 출동했습니다.
조반선 미토의 가이라쿠엔 정원 아래 센바호수 주변은 자살 투신으로 유명한 곳이지만, 열차 바퀴 밑에서 두 동강 난 시신 두 구를 봤지만 피 웅덩이는 본 적이 없었습니다. 열차 바퀴 아래에서 절단할 때는 시체에서 피가 많이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현장을 몰랐던 후루하타는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사후 검시 결과 열차 바퀴 두 개가 절단된 것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즉, 일본 국철 사장이 누군가에 의해 피를 뽑아 달리는 화물 열차에 던져져 살해당한 것입니다. 
누군가는 비웃어야 했습니다.
부끄러움은 잠시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사히 신문이 미군이 그의 피를 뽑아냈다고 심각하게 보도할 때까지 모두 침묵했습니다. 
그렇게 후루하타의 난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시모야마 사건 직후 히로사키 대학 교수의 아내를 살해한 사건에서 그는 나스 요이치의 후손인 다카시의 셔츠에 묻은 얼룩이 사람의 피라고 밝혀 그를 진짜 살인범으로 만들었습니다. 
이후 시코쿠에서 대금업자가 살해된 자이타가와 사건, 미야기의 마쓰야마 사건, 시즈오카의 어린 소녀 살인 사건 등 복잡한 사건들이 후루하타의 증언을 바탕으로 연이어 해결되었고, 모두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불가능한 상황이었지만 검사와 판사는 도쿄대학의 권위를 따랐습니다. 
그리고 20년 후인 1971년, '히로사키 대학 교수의 아내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다키타니라는 사람이 나와서 '히로사키 대학 교수의 아내를 내가 죽였다'고 말했습니다. 
미시마 유키오의 목숨을 건 호소에 감명을 받은 타키타니는 인생에서 단 한 번이라도 옳은 일을 하기로 결심하고 자백했습니다.
경찰은 다키타니가 진범임을 확인했습니다.
나스 다카시는 완전히 무죄였습니다. 
즉시 재심을 신청했지만 센다이 고등법원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신청을 기각했습니다. 
이듬해 후루하타 다네모토는 사망했습니다.
재심이 이루어지더라도 도쿄대학의 권위는 더 이상 증인석에 서지 못하고 굴욕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등법원은 즉시 재심을 시작했고 나스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이어서 후루하타의 증언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자이타가와 사건의 다니구치 시게요시 등에 대한 재심도 이어졌습니다. 
후루하타의 의견은 뒤집혔고 다니구치와 다른 3명은 사형수에서 풀려났습니다. 
도쿄대학의 권위는 추락했고, 도쿄대학과 게이오대학이 번갈아 가며 전문가 증언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시모야마 사건에서 후루하타를 지지했던 아사히는 체면을 구겼지만 교활한 신문이었습니다.
완전히 돌아선 그들은 이제 “모든 것이 억울한 누명”이라고 주장합니다.
수도권에서 여성 회사원 10명을 살해한 오노 에쓰오도 아사히의 끈질긴 주장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고, 인권 옹호자인 다테야마 신이치 부장판사는 그를 무죄로 풀어주었습니다. 
오노는 상당한 국가 보상금을 받고 출소하자마자 또 다른 여성을 살해했습니다. 
무고죄 캠페인은 확산되었고, 오사카에서 초등학교 6학년 소녀가 불에 타 숨진 사건의 경우 변호인은 혼다 경트럭에서 휘발유가 누출되었다는 이론을 근거로 재심을 요구했습니다. 
이 소녀는 의붓아버지에게 강간을 당했고, 의붓아버지는 생명보험에 가입한 상태였습니다.
보험금을 노린 살인 사건처럼 보였지만 무고 붐 덕분에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어떤 악의적인 사람이라도 무고죄가 적용되면 무죄를 선고받을 수 있습니다.
아사히가 앞장서서 일가족 4명이 살해된 하카마다 사건의 재심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재심 결정이 내려졌을 때 신문은 '재심은 무죄를 입증하는 것과 같다'는 어조로 보도했습니다. 
시즈오카 지방 검찰청은 “재심에서 하카마다의 유죄를 다시 입증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재심은 결코 무죄의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과거의 잘못된 유죄 판결은 모두 후루하타 다네모토 때문이었지만 후루하타는 사라졌기 때문에 재심은 하카마다의 무죄를 증명할 수 없습니다.
아사히는 항상 바보들의 편에 서서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그 사실을 깨닫게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2024/7/8 in Akas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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